본문 바로가기
정보모음/문화, 영화, 책

[영화] 헤어질 결심, 색채와 대사의 향연

by Whatever it is, it matters 2025. 3. 31.

 

 

박찬욱 감독의 영화 <헤어질 결심>은 치밀한 미장센과 대사로 엮인 미스터리 멜로입니다.

 

이동진 평론가님은 이 영화에 최고 평점 5점을 주며, “파란색으로도 보이고 녹색으로도 보이는 그 옷처럼, 미결과 영원 사이에서 사무치도록.”이라는 한 줄 평을 남겼습니다. 말처럼 이 작품은 초록(산)과 파랑(바다)의 색채를 교차시키며 인물들의 얽힌 심리를 그려내고, 그 사이로 붉은 색감이 피어올라 피와 욕망, 갈등의 순간들을 포착합니다. 탕웨이와 박해일이 연기한 두 주인공(서래와 해준)은 안개처럼 모호한 관계 속에서 대사 한 마디 한 마디에 숨겨진 진심을 주고받습니다.

 

 

산속 그녀: 의심과 욕망의 초록빛 미로

첫 번째 인상적인 장면은 산 정상 추락 사건을 수사하는 초반부입니다. 형사 장해준(박해일)은 안개 자욱한 녹색 산속에서 사건을 직감적으로 파악합니다. 사망자의 아내 송서래(탕웨이)를 용의선상에 올리며 처음 마주한 그녀에게서 묘한 끌림을 느끼는데, 평론가 이동진은 영화 속 안개를 "상대의 마음을 알 수 없는 안타까움"을 형상화한 장치로 해석했습니다. 카메라는 망원렌즈로 두 인물의 일상을 교차 편집하며 형사와 용의자 이상의 친밀감을 쌓아 올립니다.

산중 수사 장면에서 가장 눈에 띄는 미장센 요소는 송서래의 의상입니다. 푸른 셔츠에 녹색 코트를 입었지만, 코트를 벗으면 안감과 치마에 은은한 붉은 색채가 드러나도록 배치되어 있습니다. 이는 서래의 양면성을 암시하며, 빛과 안개에 따라 파랑으로도 녹색으로도 보이는 청록색 드레스가 그녀의 이중성을 돋보이게 합니다. 서래는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하고, 인자한 자는 산을 좋아한다"고 말하며 "난 인자한 사람이 아닙니다. 난 바다가 좋아요"라고 덧붙입니다. 이는 자신의 비정함을 에둘러 드러내는 동시에 해준에게 묘한 매력을 어필한 셈입니다.

해준은 서래를 향한 의심과 연심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다 결국 "완전히 붕괴됐어요"라고 고백합니다. 그의 아내 정안(이정현)은 남편의 변화를 눈치채고 담배 냄새를 맡으며 "피웠네, 피웠어"라는 탄식을 남기며 둘 사이 관계에 금이 가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바다 끝에서 마주한 진심: 영원한 미결의 사랑

시간이 흘러 두 번째 장면은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펼쳐집니다. 해준은 바닷가 도시 이포에서 서래와 재회하지만, 그녀의 새로운 남편마저 의문사합니다. 바닷가에서 마주한 두 사람 사이에는 분노와 비탄이 교차합니다. 해준이 "내가 그렇게 만만합니까?"라며 분노를 터뜨리자, 서래는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라는 질문으로 관객의 가슴을 울립니다.

결정적인 단서는 바다에 버려졌던 휴대전화였지만, 해준은 결국 서래를 지키는 선택을 하며 "저 폰은 바다 깊은 곳에 버려요. 아무도 못 찾게"라고 말합니다. 이는 진실을 은폐하는 지시이자 사랑한다는 고백이었습니다. 서래는 마지막 부탁을 남기고 바닷속에서 스스로를 영원히 감춰버립니다.

마지막 바닷가 장면의 색채와 연출은 압권입니다. 해질 무렵 잿빛 푸른 바다를 등지고 서 있는 서래의 모습은 쓸쓸하고도 아름답게 다가옵니다. 산과 바다, 녹색과 청색으로 대비되던 화면은 이 순간 하나로 포개어지며, 그녀의 운명을 상징적으로 그려냅니다.

 

 

<헤어질 결심>의 결말을 보고 나면 관객은 한동안 할 말을 잃게 됩니다.

두 주인공의 러브스토리는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그 여운은 오래도록 마음을 울립니다. 영화의 제목 ‘헤어질 결심’은 곧 사랑할 결심이자 영원히 헤어지지 않을 결심이라는 역설을 담고 있습니다. 결국 헤어짐을 선택한 그 순간에 비로소 사랑은 영원한 형태로 완성된 것입니다. 박찬욱 감독은 색채와 대사로 정교하게 구성한 이 영화를 통해 관객에게 헤어질 결심을 요구하며, 우리는 그 사랑의 미로 속에서 오래도록 헤어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