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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피 한 방울 안 튀기고도 심장을 쥐어짠다 – 영화 《승부》 감상기

by Whatever it is, it matters 2025. 3. 29.

 

 

바둑 영화? 솔직히 처음엔 큰 기대는 안 했다.
하지만 평이 너무 좋길래 궁금해서 극장에 들어갔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야.
조용한데, 숨 막히고, 피는 안 튀는데 심장은 미친 듯이 뛴다.
영화 끝나고 한참을 멍하게 앉아 있었을 정도로 몰입감이 어마어마했다.

《승부》는 조훈현과 이창호, 두 천재 바둑기사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드라마다.
소리 없이, 말 없이, 바둑판 위에서 오가는 승부.
그 안에 담긴 존재감, 자존심, 그리고 인간적인 흔들림.
이 영화는 그런 것들을 놀랍도록 밀도 높게 보여준다.

전쟁의 신(전신)과, 신이 내린 계산(신산)

바둑계의 제왕 조훈현(이병헌 분)은 어느 날,
이창호라는 이름의 어린 천재를 발견한다.
그렇게 자기 집에 들여 제자로 직접 키운다.

하지만 두 사람의 바둑 스타일은 완전히 다르다.

 

조훈현은 직선적이고 강한 공격수,

이창호는 조용하지만 한 수 한 수가 깊은 침묵형 승부사.

 

스승은 제자의 느릿하고 계산적인 기풍을 이해하지 못하고,
결국 윽박지르며 갈등이 생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제자의 재능을 인정하게 되고,
둘은 어느새 대한민국 바둑계의 양대산맥으로 성장한다.

 

결국…
국민적인 관심이 집중된 자리에서 두 사람은 정상에서 맞붙는다.
그리고 바로 그 유명한 ‘반집 승부’.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의 충격 속에 패배한 조훈현은 바둑을 포기하려고까지 한다.

 

하지만 영화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무너졌던 스승은 다시 일어난다.
그리고 제자와 다시 마주 선다.
승부를 넘어선 관계, 우정, 존중, 라이벌리.


이야기의 흐름은 진짜 감동적이고, 깊다.


배우들 연기 미쳤다

이병헌은 그냥 조훈현 그 자체다.
감정의 높낮이를 눈빛 하나로 표현하는 배우답게, 말없이 앉아 있어도 존재감이 화면을 꽉 채운다.

 

유아인은 정말 놀라웠다.
이창호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 속에 숨어있는 예민함과 날카로움,
그리고 스승을 넘어서려는 조용한 오기, 전부 다 제대로 느껴졌다.

 

조연들도 전부 한 자리씩 꿰찼다.

이 영화, 이병헌과 유아인 두 사람만으로도 꽉 찼지만,
조연 배우들이 진짜 제 몫 이상을 해낸다.
한 명 한 명 다 살아 있고, 캐릭터가 다 박혀 있다.
그래서 더더욱 영화가 입체적으로 느껴졌다.

  • 고창석은 바둑 전문 기자 ‘천승필’ 역으로 등장하는데,
    말투, 표정, 행동 하나하나에서 90년대 바둑계 특유의 고집과 정통성이 뚝뚝 묻어남.
    감초 같으면서도 감정선의 완급을 잘 잡아준다.
  • 현봉식은 바둑 기사 ‘이용각’ 역으로 나와
    조훈현과 이창호 사이에서 흐르는 긴장과 미묘한 분위기를 잘 풀어준다.
    말 그대로 숨은 연결고리 같은 역할.
  • 문정희는 조훈현의 아내 ‘정미화’로 출연해서,
    바둑이라는 광기 속에서 흔들리는 남편 곁을 묵직하게 지켜준다.
    단순한 가족 캐릭터가 아니라, 조훈현의 인간적인 내면을 비추는 거울 같은 존재였달까.
  • 조우진은 이번에도 딱 자기 스타일이다.
    ‘남기철’이라는 가상의 바둑기사로 등장하는데,
    조훈현의 라이벌 같은 존재로서 강한 인상을 남긴다.
    등장만 해도 공기 확 바뀜. 신경전 장인.
  • 그리고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김강훈.
    어린 이창호 역할로 나와서 천재 소년의 고요한 집중력을 너무 잘 표현해냈다.
    어린 배우인데도 눈빛에서 이창호가 보인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님.

이 조연진이 없었다면 영화가 이렇게까지 완성도 있게 나오진 못했을 거다.
각자가 제 역할을 정확히 알고 움직이는 느낌,
서로 부딪히지도 않고, 튀지도 않고, 딱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사람이 그 자리에 있었다.

 


미장센 – 담배연기 속에 피어난 긴장

이 영화의 또 하나의 매력은 90년대 바둑계의 공기, 분위기, 시대감이다.
특히 실내에 자욱한 담배 연기가 만들어내는 그 정서.
물론 지금 기준에선 담배 연기 자체는 부정적일 수 있지만,
그 당시의 분위기를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데에는 진짜 압도적이다.

바둑판 위로 올라가는 연기,
서로를 노려보는 침묵,
그 순간을 담배 연기가 정지된 시간처럼 붙잡고 있는 느낌.
마치 《화양연화》에서의 담배 연기처럼,
그 시절의 낭만과 슬픔이 동시에 피어난다.


감독 이야기 – 김형주

감독은 김형주. 윤종빈 사단으로 생각할수도 있다.
과하지 않고, 디테일과 템포 조절이 뛰어나다.
실화를 다루면서도 감정에 빠지지 않고,
절제하면서도 감동을 주는 연출이 정말 인상 깊다.

특히 인물 간의 거리,
눈빛 하나,
한 수를 두는 손의 움직임까지 놓치지 않는 카메라는
감독의 감각과 애정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이 다음 작품이 벌써부터 기대될 정도.


다시 한 번 더 볼 영화, 승부

《승부》는 단순한 바둑 영화가 아니다.
스승과 제자의 성장, 갈등, 그리고 극복의 이야기.
그리고 그 안에서 인간이 자존심과 감정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메시지가 있다.

처음엔 그냥 “평이 좋다니까?” 하고 가볍게 봤다.
하지만 나오는 순간엔 올해 최고의 몰입감과 긴장감을 떠안고 나왔다.
피 한 방울 안 튀는데,
심장은 두근거리고,
손바닥에 땀이 흥건하다.

이런 영화,
진짜 또 어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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