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한 장면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안개 자욱한 산정에서 한 여인이 사랑을 남기고 흔적처럼 사라진다. 또 다른 시대, 격변의 상하이에서 한 젊은 여인이 단 한 사람을 위해 목숨을 내던진다.
서로 다른 시대와 배경이지만, 두 장면 모두 금지된 사랑의 비극을 담고 있다. 이 이미지를 만들어낸 이는 한국의 박찬욱 감독과 대만 출신의 이안(Ang Lee) 감독, 그리고 그 중심에는 배우 탕웨이가 있다.
두 거장은 각기 독보적인 영화 세계로 명성을 얻은 감독들로, <헤어질 결심>(2022)과 <색, 계>(2007)을 통해 사랑과 욕망, 그리고 윤리 사이의 묵직한 딜레마를 아름답고도 처연하게 그려낸다.
이 감성적인 두 멜로 드라마를 통해 우리는 두 감독의 스타일과 작품 세계, 그리고 탕웨이라는 배우가 지닌 상징성을 마주하게 된다.
두 거장 감독의 위상과 스타일
박찬욱 감독은 한국을 대표하여 세계 영화계에 이름을 올린 거장으로,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 <아가씨> 등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쌓았다. 그는 한국 영화는 물론 21세기 세계 영화사에서 가장 저명한 영화감독 중 한 명으로 손꼽히며, 범죄·미스터리와 스릴러 장르를 절묘하게 혼합한 독창적 스타일을 선보여왔다. 특유의 감각적인 촬영과 파격적인 연출, 블랙유머와 폭력미가 조화를 이루는 그의 작품들은 강렬한 미장센으로 관객을 매료시킨다.
그런 박찬욱 감독이 오랜만에 선보인 <헤어질 결심>은 이전의 폭력적이고 과감한 색채를 걷어내고 한층 절제된 멜로 감성으로 방향을 틀어 그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준 작품이다.
이 영화로 그는 2022년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하며 다시 한번 세계적 거장의 저력을 입증했다.
한편 이안 감독은 대만 출신으로 국제 무대에서 크게 성공한 영화감독이다. <와호장룡>, <브로크백 마운틴>, <라이프 오브 파이> 등 동서양을 넘나드는 다양한 작품을 통해 두 차례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은 바 있는 세계적인 명장이다.
그의 영화들은 인간 내면의 억눌린 감정과 숨겨진 욕망을 섬세하게 포착해내는 것으로 유명하며, 문화적 배경과 장르를 가리지 않고 깊은 감성의 울림을 만들어낸다. 2007년작 <색, 계>는 이러한 이안 감독의 특징이 극대화된 작품으로, 1940년대 일제 점령기의 상하이를 배경으로 한 에로틱 첩보 멜로 영화다.
이 작품은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거머쥐며 작품성을 인정받았고, 이안 감독 특유의 디테일한 시대묘사와 파격적인 연출(특히 노골적이면서도 예술적으로 그려낸 정사 장면)로 큰 화제를 모았다. 두 감독 모두 서로 다른 개성과 미학으로 영화사를 빛내고 있지만, 사랑을 바라보는 날카로운 시선과 서사를 풀어내는 능력만큼은 닮아 있다.
금지된 사랑의 미장센: <헤어질 결심>과 <색, 계>
두 영화 <헤어질 결심>과 <색, 계>는 겉보기엔 시대와 장르가 다르지만, 공교롭게도 닮은 구석이 많다.
우선 이야기의 뼈대부터가 “위험하고 금지된 사랑”이다.
<헤어질 결심>에서는 살인 사건을 수사하는 형사 해준(박해일 분)이 용의자인 미망인 서래(탕웨이 분)에게 끌리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경찰과 용의자라는 관계는 애초에 이루어질 수 없는 금기이고, 해준은 직업윤리와 감정 사이에서 갈등한다.
반면 <색, 계>에서 탕웨이가 연기한 대학생 왕치아즈는 항일 비밀결사의 임무로 친일파 정부 고위직 이모청(양조위 분)에게 접근한다. 둘의 관계 역시 스파이와 타깃, 더구나 유부남과 처녀 대학생의 위험천만한 밀회로서, 사회적으로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사랑이다. 이렇듯 두 영화는 사랑해서는 안 될 상대에게 빠져드는 남녀를 그리며, 사랑과 의무 사이에서 흔들리는 인물들의 감정선을 촘촘히 따라간다.
두 영화 <헤어질 결심>과 <색, 계>는 겉보기엔 시대와 장르가 다르지만, 공교롭게도 닮은 구석이 많다. 그 중심에는 “만나서는 안 되는 관계”가 있다.
<헤어질 결심>에서는 살인사건을 수사하는 형사 해준(박해일 분)과 용의자 서래(탕웨이 분)의 관계가 핵심이다. 이 둘은 단순히 사회적으로 금기인 감정선을 넘어, 질서와 혼돈, 수사와 사건, 진실과 거짓 사이에 선 이질적인 존재들이다. 서로를 이해하고 끌리지만, 본질적으로 같은 세상에 설 수 없는 입장을 상징한다.
<색, 계> 역시 그 구조는 놀랍도록 닮아 있다. 항일 비밀결사 소속 대학생 왕치아즈(탕웨이 분)가 친일파 고위 인사 이모청(양조위 분)에게 접근하며 벌어지는 이야기인데, 이 둘의 관계는 단순한 스파이와 타깃을 넘어서 역사적 적대와 이념적 충돌, 그리고 그 속에서 싹트는 인간적 동요를 고스란히 품고 있다.
박찬욱의 <헤어질 결심>은 현대의 도시와 자연 경관을 배경으로 세련된 느와르 멜로 분위기를 풍긴다. 박찬욱 감독은 이 영화에서 산과 바다를 중요한 상징으로 활용하는데, 이는 주인공들의 관계를 은유적으로 비춘다. 해준과 서래는 서로를 “산”과 “바다”로 빗대는데, 굳건함과 깊이를 지닌 두 세계가 맞닿지만 끝내 섞이지 못하는 모습을 암시한다.
영화의 미장센 또한 이러한 주제를 섬세히 떠받친다. 예컨대 서래가 입는 푸른빛과 녹색빛이 애매하게 교차하는 원피스, 거실 벽지에 그려진 산인지 바다인지 모를 풍경처럼, 화면 속 요소들은 인물들의 모호한 정서와 진실을 시각화한다.
박찬욱 감독은 실제로 서래의 캐릭터를 중국인으로 설정한 뒤 탕웨이를 캐스팅하기 위해 대사를 번역 앱으로 소통하게 만드는 등 현실적 디테일에서 출발해 독특한 미장센을 구축했다.
휴대폰 화면 안으로 카메라를 들이밀어 보는 파격적인 연출이나, 인물의 주관적 환영처럼 겹쳐지는 영상미는 현대 기술 시대의 소통 부재와 고독을 상징하며, 해준과 서래의 심리적 거리를 형상화한다.
특히 영화 후반부에 1차 사건이 해결된 후에도 이야기가 끝나지 않고 예상치 못한 2막으로 이어지는 구조는 관객으로 하여금 로맨스의 행방에 더욱 집중하게 만든다. 박찬욱은 일부러 전형적 필름누아르 같은 1부를 먼저 끝맺음으로써, 이후 전개가 범인 찾기가 아닌 두 사람의 관계 그 자체임을 깨닫게 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결국 <헤어질 결심>은 치밀한 연출 아래 사랑의 설렘과 의심, 죄책감과 연민이 뒤얽힌 감정의 미로를 우아하게 펼쳐 보인다.
이에 비해 이안 감독의 <색, 계>는 1940년대의 시대극으로서 고전적인 첩보 스릴러와 멜로의 결을 조화시킨다. 황푸 강변과 상하이의 골동품 같은 거리, 어둡고 무거운 실내 조명 아래 마작을 두는 귀부인들의 모임 등, 영화 곳곳에는 당대의 공기를 그대로 재현한 디테일이 살아 있다.
담담하고 느린 호흡으로 진행되는 서사는 관객을 점점 긴장 속으로 끌고 들어가며, 절정에서는 폭발적인 감정의 불꽃을 피워낸다.
이안 감독은 <색, 계>를 통해 억눌린 욕망과 연기의 가면이라는 주제를 탁월하게 형상화했는데, 특히 세 차례에 걸쳐 묘사되는 정사 장면들은 두 인물 사이 권력관계와 감정 변화를 적나라하면서도 예술적으로 보여준다.
처음 육체를 나누는 순간의 거칠고 폭력적인 기류는 점차 뜨겁고도 애절한 정사로 변화하며, 이를 통해 왕치아즈와 이모첸 사이에 싹튼 진짜 애정과 의존을 드러낸다. 이안 감독 본인도 이 노골적 장면들이야말로 이야기의 핵심이며 “궁극의 연기”라고 강조했을 정도로, 섹슈얼리티 자체가 이 영화에선 캐릭터의 심리와 운명을 말해주는 미장센의 일부가 된다.
한편 극중 연극 동아리 학생 출신인 왕치아즈는 임무를 위해 가짜 신분으로 연기하는 배우이고, 이모첸 앞에서는 사랑에 목마른 여인의 진심이 섞인 이중 연기를 펼친다.
이러한 “연기 속의 연기” 구조는 영화 전체에 짙은 비극의 그림자를 드리우며, 마지막 순간 왕치아즈가 내리는 선택 – 적을 놓아주고 스스로 죽음을 맞는 행위 – 역시 한순간 본모습의 사랑하는 여자로 돌아가 내린 결정이었음을 암시한다.
느릿한 음악과 함께 클로즈업된 탕웨이의 흔들리는 눈빛, 작별 인사를 남기듯 건네진 다이아몬드 반지, 그리고 뒤이어 찾아오는 총성은 관객의 가슴에 오래도록 먹먹한 잔향을 남긴다. 이처럼 <색, 계>는 우아한 시대미술과 과감한 서사 연출로 사랑과 배신, 애국과 욕망의 교차점을 탁월하게 그려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탕웨이의 상징성과 두 작품의 공통 정서
두 영화를 이야기하면서 탕웨이(Tang Wei)라는 배우를 빼놓을 수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이 두 거장 감독의 정점에 탕웨이의 얼굴과 눈물이 겹쳐있기 때문이다.
탕웨이는 <색, 계>를 통해 혜성처럼 등장해 전 세계 영화계에 자신의 이름을 알렸고, 15년 뒤 <헤어질 결심>으로 한국 영화에 돌아와 또 한 번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박찬욱 감독이 “탕웨이를 캐스팅하기 위해 캐릭터를 중국인으로 만들었다”고 고백했을 만큼, 그녀는 작품 자체에 영감을 불어넣는 존재였다.
두 영화에서 탕웨이가 연기한 캐릭터들은 모두 사랑을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여인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색, 계>의 왕치아즈는 결국 사랑하는 남자를 살려 보내기 위해 조국과 동지를 배신하고 자기 목숨까지 내던진다.
마찬가지로 <헤어질 결심>의 서래도 사랑하는 해준의 품위와 양심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흔적을 바닷속에 묻어버린다.
흥미롭게도 두 영화는 모두 여주인공이 땅에 파묻히며 끝나는 장면으로 막을 내린다.
<색, 계>에서 왕치아즈는 총살 직전 커다란 구덩이 가장자리에 무릎 꿇고 처절한 최후를 맞이하고, <헤어질 결심>에서 서래는 스스로 바닷가 모래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밀려오는 파도에 몸을 숨긴다.
사랑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두 여인은 그렇게 땅(혹은 바다) 속에 영원히 묻혀 버리고, 남겨진 남성들은 뒤늦게 절규하거나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안고 살아가게 된다.
이 비극적인 이미지들은 탕웨이라는 배우가 스크린 위에서 보여주는 멜로 드라마의 정조(貞操)와도 닿아 있다.
탕웨이는 극중에서 직접 “사랑한다”는 말을 거의 하지 않지만, 그녀의 절제된 표정과 눈빛, 세밀한 감정 표현을 통해 말보다 깊은 사랑을 전달한다.
관객은 그녀의 미세한 숨결과 떨리는 눈망울을 통해, 말로는 다 표현하지 못하는 비극적 순정의 무게를 직감하게 된다.
그래서일까, 탕웨이가 연기하는 사랑은 늘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끝끝내 빠져들게 되는 치명적 감정으로 다가온다.
현재 아시아 영화계에서 이러한 희로애락을 깊이 있게 표현하면서도 우아함을 잃지 않는 배우는 탕웨이가 독보적이며, 두 작품에서 그녀는 그야말로 영혼을 불태운 열연으로 캐릭터와 일체화되었다.
두 영화가 남긴 여운
박찬욱의 <헤어질 결심>과 이안의 <색, 계>는 각기 다른 배경과 양식을 지녔지만, 모두 사랑의 극한을 탐구한 걸작으로 오래 기억될 것이다. 한 작품은 현대의 세련된 미스터리 로맨스로서 절제된 미장센 속에 숨은 불꽃을 품고 있고, 다른 하나는 고전적 멜로드라마의 외피 속에 격정의 용광로를 숨긴 채 관객을 서서히 달군다.
두 거장은 각자의 언어로 금단의 사랑을 노래하지만, 그 선율은 모두 애절하고도 아름답다. 특히 탕웨이라는 하나의 뮤즈(muse)를 통해 두 영화는 묘한 공명을 이룬다. 그녀가 표현한 고독과 열망, 희생의 정서는 두 감독의 미장센 안에서 영원히 숨 쉬며, 우리에게 사랑의 복잡한 얼굴을 생각하게 만든다.
영화를 다 보고 난 뒤에도 쉽사리 가시지 않는 여운, 마치 안개처럼 희미하게 남았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는 감정의 흔적이 마음에 남는다. 그것이 바로 박찬욱과 이안, 그리고 탕웨이가 함께 빚어낸 영화적 마법의 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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