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툭 까놓고 재벌
독서일: 2016/10/05 오전 11:34
비고: 2016년 10월 5일 오전 11:34
작가: 이동형
출판사: 왕의서재
**머리말: 재벌의 탄생과 성장에 관한 날 것**
2002년 10월 타워팰리스가 첫 입주자를 받을 무렵 이건희는 "입주자 자격 심사를 하라"고 했다. ... 당시 이건희는 삼성 고위 임원, 변호사, 의사 등 전문직으로 성공한 사람, 문화, 학술계 유명인사 등을 입주자격으로 내세웠다. ... 타워팰리스 안에는 '게스트룸'이라는 게 있다. 손님이 묵는 방이다. 외부인과 섞이기 싫다는 발상이 그대로 녹아있는 건물 설계인 셈이다. 손님이 오면 집에서 재우는 게 예절에 맞다. 그러나 타워팰리스는 손님을 집 바깥에 있는 게스트룸에서 재우도록 설계돼 있다. "잘난 사람들은 못난 사람들과 섞여 지내면 안 된다."는 발상이 녹아 있는 건물구조다.
2010년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자료로는 한국에 기업 수는 312만 5,457개다. 독자들은 이 중에 대기업 숫자가 얼마나 되리라고 생각하시는가? 대기업 숫자는 고작 187개에 불과하다. 비율로 따지면 0.00006%다. 이런 비율로 시장을 독점해 하청업체를 쥐어짜거나, 골목상권으로 진격해 서민들 생계를 위협하는 것이 대한민국 재벌의 현주소다.
대기업이 고용하는 수준은 전체 산업규모의 7.5%에 지나지 않는다.
박근혜 정부 첫해인 2013년에는 7조 370억 원의 법인세를 깎아 주었다. 더 놀라운 것은 전체 기업이 받은 법인세 감면액 중, 중소기업이 차지하는 비율이 3.1%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나머지 96.9%는 재벌들 몫이었다.
부자에게로 들어간 돈은 절대 돌아 나오지 않는다.
**1장 재벌의 탄생**
적산과 불하
- 일그러진 부의 편중 현상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우리 사회를 괴롭히는 몹쓸 고질병이 됐다.
- 1947년 미 군정이 적산을 불하한다고 발표했을 때, 한민당을 제외한 남한 모든 정당과 사회단체는 대부분 강력한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이들이 적산 불하를 반대하고 나선 이유는 '적산을 지금 불하하면 결국 소수 자본가와 부정한 관료들에게 재산이 돌아가 생산증강 효과는 물론 거주의 안정도 기대할 수 없다.'고 봤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미 군정은 적산을 불하했다.
두산 박두병
- 박두병은 아버지가 닦아놓은 터를 발판 삼아 적산기업인 기린맥주를 불하받았고 그 기린맥주가 지금의 OB맥주가 된 것이다. 두산그룹은 그 출발이 역시 적산과 불하였다.
- 1889년에 260냥을 주고 종로4가 92번지 배오개에 집을 사 1896년, '박승직 상점'을 개업한다. 취급품목은 포목이었다.(지금 이 자리는 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두산 100주년 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탑 아래에는 두산그룹에서 만든 타임캡슐이 묻혀 있다.)
- 박승직이 (화폐 정리사업)에 대응하려고 단체를 하나 만드니, 바로 '광장 주식회사'다.(현 동대문시장) 자본금 7만 8,000원, 대주주 26명의 이 주식회사는 국내 최초의 주식회사로 기록된다.
- 두산그룹을 말할 때는 정정숙을 빼놓을 수 없으니, 그녀가 박두병을 낳아서가 아니라 그녀가 만든 화장품 '박가분' 때문이다.
- 기린맥주는 1933년에 우리나라에 들어왔고 당시 주식은 1주당 50원씩이었다. 주식은 모두 6만 주를 발행했는데 한국인 주주는 딱 두 명이었고, 이들은 6만 주 중, 각각 200주만을 보유했다. 조선인 주주 두명 중, 한 명이 바로 박승직이었다.(나머지 한 명은 삼양사 창업주 김연수)
- 1945년 일제가 물러나고 공장이 비어있으니 기린맥주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만든 자치위원회에서는 둘뿐인 조선인 주주 중 한 명인 박승직을 찾아가 지배인을 맡아달라고 요청했고 박승직은 아들인 박두병을 기린맥주 지배인 겸 관리자로 임명하고 입사시켰다.
선경 최종건
- 1939년, 선경직물회사가 조선에 설립된다. 이 회사는 선만주단주식회사와 일본 경도직물주식회사가 공동출자해서 만들어졌다. 선만주단의 '선', 경도직물의 '경'이 두 자를 따서 회사 이름을 선경이라 지었다.
- 1944년에 최종건은 선경직물에 수습사원으로 입사한다.
- 해방 후 선경직물은 적산 기업으로 선정됐다. 최종건은 생산부장에 임명돼 공장 경영을 맡았다.
- 최학배는 최종건이 매일 나가서 재건하고 있던 선경직물 공장을 찾아가 최종건을 만나고 200만 환을 아들에게 쥐여주었다. 마침내 1953년 8월 14일, 최종건은 선경직물주식회사를 130만 환에 불하받았다. 최종건 나이 불과 28세였다.
- 이승만 정부는 선경에 3만 달러의 원사수입용 외환을 배정해주고 500만 환의 기업육성자금까지 지원해 줬다. 당시 암시장에서 달러는 1달러당 500환이었는데, 정부의 공정환율은 180환이었다. 다시 말해, 외환만 배정받으면 몇 배가 넘는 환차익을 볼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정부는 다양한 방법으로 선경에 특혜를 줬다. ICA 산업자금 4만 5,000달러도 지원받았다.
한화 김종희
- 김종희는 든든한 뒷배와 화학 공장 직원이라는 특수함으로 신입사원이지만 사택을 받는 등 편의를 얻고 더 나아가서 일제 총동원령에 따른 '징병'까지 면제되는 특혜를 받는다. 조력자의 도움이 대자본을 일구는 데 필요한 요건임을 또 한 번 보여주는 일화다.
- 롯데 신격호 뒤에는 사업 초기, 자금과 판매처를 책임져주었던 하나미츠와 그가 일본에서 거상이 될때까지 물심양면으로 도와줬던 처가가 있었다.
- 대한전선 설경동 뒤에는 공무원이던 그를 스카우트하고 물심양면 도와줬던 부춘 운송점의 일본인 사장이 있었다.
- 김종희도 고이케의 도움이 없었다면 화약 공장으로 취업하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고, 훗날 미군 고문관 스미스의 조력이 없었다면 화약 공장을 불하받는 행운 따위도 없었을 것이다.
- 김종희는 1952년 6월 12일에 있었던 조선화약공판주식회사를 매각하는 입찰에서 23억 4,568만 원에 낙찰받아 한국화약을 설립한다. 이듬해 화폐개혁이 단행되고 김종희는 바뀐 금액 2,345만 6,800환의 절반인 1,172만 8,400환을 납부해 조선화약공판주식회사를 불하받았다.(조선화약공판주식회사를 불하받을때 한화그룹 회장인 장남 김승연이 태어난다.)
대성 김수근
- 1941년 26세가 되던 해에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어머니 소개로 같은 교회에 다니던 여귀옥과 결혼한다.(대성그룹과 한국 개신교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김수근의 장인, 여용섭은 하루에 백석을 번다고 하는 대부호였다. 김수근이 잘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우고 일본유학을 떠난 것, 사기로 모든 재산을 잃고 나서도 조선연료라는 당시 최대 연료공장을 불하받은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 1947년 김수근은 대구에 100평의 땅을 마련해 '대성산업공사'라는 연탄회사를 만든다. 이것이 대성그룹의 모태가 된다. 이후, 조선연료, 삼국석탄, 문경탄광을 불하받아 남한 최대 규모의 연료회사가 됐다.
- 김수근은 1960년대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자 실질적으로 에너지 산업을 독과점하면서 승승장구한다. 1964년에 LPG판매업, 1968년에 석유류 판매업가지 따내며 재계서열 10위권까지 진입한 것이다.
- 지난 대선(2012년)에서 "재벌 좌파"라는 해괴한 발언을 하며 새누리당 공동선거대책위원장에 임명된 김수근의 딸, 김성주(성주인터내셔널 사장)의 행동과 발언을 ...
- (성주인터내셔널은 IMF로 부도위기에 놓이지만, 아버지 기업인 대성그룹이 도와줘 살아날 수 있었다. 그 뒤 그녀는 자기 오빠와 MCM의 소유권을 놓고 법정 분쟁까지 벌였다.)
쌍용 김성곤
- 해방되고 서울로 상경한 김성곤은 자신이 존경하는 기성수가 했던 사업을 쫓아 방직회사를 차린다. 시작은 당연히 적산 불하였다. 일제가 조선직물과 경기염직에 옮겨 설치해 놓고 간 포장도 뜯지 않은 방적기 2,000추를 싼값에 불하받아 금성방직을 설립한 것이다. 금성방직을 설립한 김성곤은 삼공유지를 매각했다. 이 금성방직은 성공에 성공을 거듭하여 쌍용그룹의 모체가 된다.
원조자금
- 재벌들이 50년 대에 부를 쌓을 수 있게 한 또 하나의 수단이 바로 미국과 UN의 원조자금이었다. 원조자금은 UNKRA(유엔한국재건단), ICA(국제협조처), PL(미구 공법)-480호 등 세 가지 경로로 들어왔는데 1953~1960년가지 한국의 총수입 중 74%가 원조였으며 정부수입액 중 40%가 원조금액이었을 정도로 엄청나게 큰 규모였다.
- 이 땅에 삼성그룹을 있게 한 제일제당과 제일모직도 이병철 개인 돈으로 설립한 것이 아니라 이런 미국 원조금으로 지어졌다. (ICA 원조금액은 1953년에서 1961년 사이 1,811만 7,000달러였는데 제일제당이 이 중 3분의 1을 차지했다.)
- 저곡가 정책과 미국 잉여농산물 원조에 직접 타격을 입은 지역은 곡창지대인 호남이었다. 1960년에 전체 호남 인구는 590만 명으로 영남의 790만 명에 200만 정도 차이밖에 보이지 않았으나 15년 뒤인 1975년에는 영남이 1,000만 인구를 돌파했을 때, 호남 인구는 650만 명에 그쳤다. 1985년에는 영남이 1,200만 명, 호남은 590만 명으로 호남인구는 오히려 줄어들었다.
박정희 정권에서 승승장구한 김성곤
- 1960년대 말에 착공에 들어간 영동화력발전소 1,2기는 모두 세지마 류조의 이토추상사가 건설한다. 총 공사비는 2,600만 달러였고 김성곤은 여기서 4%를 커미션으로 가져갔다.
- 당시 공화당은 '4인 체제'라고 해서 김성곤(중앙위 의장) 길재호(정책위 의장) 김진만(재정위원장, 동부그룹 회장 김준기의 아버지) 백남억(당 의장)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 4인 체제는 김종필 견제용으로 박정희가 주도한 것이었다.
- 'SK 구상' 박정희가 3선으로 물러나면 일본과 같은 내각책임제를 시행하겠다는 복안
한진 조중훈
- 재벌들은 더하다. 재벌들의 면제 비율은 33%다. 세 명 중, 한 명은 군대에 안 간다는 의미다. SK그룹의 군 면제 비율은 57%이고, 재벌 중에 최고 부자라고 하는 삼성가의 면제율은 무려 73%다.
**2장 재벌의 성장 1**
은행의 민간 불하 특혜
- 삼성 이병철은 흥업은행(현 우리은행) 주식 85%와 조흥은행(현 신한은행) 주식 55%를 확보했다. 제일은행은 삼호방직 정재호에게 불하됐고, 대한제분은 상업은행, 대한양회 이정림은 서울은행(현 하나은행)을 창립했다.
- 4대 시중은행 중, 절반을 자기 손에 넣은 이병철은 '대출'이라는 막강한 힘을 등에 업고 '사업 다각화'라는 명분으로 문어발 확장을 시작한다. 한일은행(현 우리은행), 제일제당, 한국타이어(조선타이어를 불하받아 만든 것), 안국화재(현 삼성화재), 천일증권, 삼척시멘트(동양시멘트), 호남비료, 근영물산, 효성물산 등을 차례로 인수했다. 삼성은 1950년대 후반에 이미 계열사를 16곳이나 거느린다.
- 현대 정주영은 조선이연금속 인천공장을 불하받아 인천제철로 만들었고, LG 구인회는 조선제련을 불하받아 LG금속을 만들었으며, 동국제강은 삼화제철을 불하받아 세워졌다. 대농 박용학은 조지야백화점을 불하받아 미도파백화점을 탄생시켰다. 이병철은 미쓰코시 백화점을 불하받아 신세계백화점을 만들었고, 벽산그룹도 천야시멘트를 불하받아 만든 재벌이다 조선제분을 불하받은 최성모는 신동아그룹을 만들었고, 민덕기는 삿포로맥주를 불하받아 크라운맥주로, 동일그룹은 동양방적을, 대한전선 설경동은 대한방직을, 동립산업 함창희는 모나리과제과를, 태창의 백낙승은 고려방직을 각각 불하받았다.
- 적산 불하 대상이 됐던 일본인 소유의 공장등은 6881개, 자본금 기준으로 한국 전 법인의 약 91%에 달하는 등 적산 불하 대상이 됐던 기업의 규모는 상당했다고 한다.(매일경제 1995년 1월 25일 재계 50년 특집) 적산 기업은 해당 기업의 주주 또는 5년 이상 근속자 등 기업과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있는 자에게 우선적으로 불해됐다.
부정축재자 처리
- 경향신문이 1990년부터 2015년 2월까지 25년간, 정리해고, 쟁의행위와 관련된 대법원 판례를 수집해 분석한 것을 살펴보면, 노동사건 408건 중, 파업정당성을 인정한 것은 59건(14.5%)에 불과했고 349건(84.5%)이 불법판정을 받았다.
- 반면, 경영상 위기로 인한 정리해고 사건 중, 해고무효 판결은 41건(29.7%)이었고, 해고정당 판결은 97건(71.3%)이나 됐다. 있는 자는 있는 자들을 편들기 마련이다.
삼성 사카린 밀수사건
- 사카린 밀수사건이 터졌을 때, 이병철 회장은 한국비료를 국가에 헌납하고 언론사의 소유지분도 내어놓겠으며 정계에서 은퇴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 약속은 당연히 지켜지지 않았고 여론이 잠잠해지자, 이병철은 슬그머니 총수 자리로 복귀했다.
- 이맹희, " 삼성은 공장건설 장비를, 청와대는 정치자금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돈을 부풀리기 위해 밀수를 하자는 쪽으로 합의를 했다. 밀수현장은 내가 지휘했으며 박 정권은 은밀히 도와주기로 했다."
- 중앙일보는 연일 지면을 활용해 삼성 밀수사건을 옹호했다. 중앙일보뿐만 아니라 같은 계열사인 동양방송도 특집 프로그램을 마련해 "삼성은 죄가 없다"고 항변했다.
삼분 폭리 사건
- 설탕, 시멘트, 밀가루
- 우리 재벌들은 정치권과 결탁해 사재기하고 세금을 포탈하며 그 대가로 박정희와 공화당에 정치자금을 제공했다. 사재기한 삼분은 역시나 가격을 폭등하게 했으니 1962년 흉작에 배를 곯던 국민은 허리띠를 더욱더 졸라맬 수밖에 없었다.
- 기사를 막으려 삼성이 쏟은 노력 또한 눈물겨웠다. 삼성은 경향신문 2월 1일 자 신문, 수십만 부를 사들여 경향신문 가판은 창간 이래, 최대 부수를 파는 기엽을 토했다.
부실기업 인수
대우그룹과 김우중
- 김용하와 박정희는 사제지간인 셈이고, 박정희는 김우중 아버지가 김용하임을 알고 김우중을 전폭적으로 지원한다.
대우몰락
- 김우중은 은행과 나라의 도움으로 늘 위기에서 탈출했다.
- 김우중은 지푸라기라도 잡을 심정으로 대통령 김대중에게 직접 편지가지 써 손을 내밀었지만, 김대중은 묵묵부답했고 대우는 몰랐했다. 대우는 41조 원에 달하는 분식회계를 일삼았고, 은행을 이용한 사기대출 금액만도 10조 원을 넘겼다.
8.3 사채동결
- 1972년 8월 2일, 밤 11시 40분, 정부는 대통령 긴급명령으로 '경제의 안정과 성장에 관한 긴급명령 15호' 즉, '8·3 사채동결 조치'를 전격적으로 발표한다. 이 조치는 "8월 2일, 현재 모든 기업의 사채를 동결, 정부에 신고하게 하고 8월 3일 자로 월 이자, 1.35%, 3년 거치 후, 5년 분할상환조건으로 전환하거나 기업에 대한 출자로 바꿀 것을 명령"한 것이다.
종합무역상사
저임금
**3장 재벌의 성장 2**
전두환 정권이 벌인 부실기업 정리
김철호의 명성그룹은 한화그룹으로
정경유착과 정치자금
- 315 부정선거는 권력욕에 눈이 먼 이승만과 이권과 특혜만 밝힌 재벌들이 만든 합작품이라 할 수 있다. 실제 419혁명 이후, 민주당 정부가 밝힌 부정 축재자 명단에는 삼성 이병철, 삼호 정재호, 대한양회 이정림, 대한전선 설경동, 동양시멘트 이양구, 극동해운 남궁련, 엘지 구인회, 태창 백남일, 동립산업 함창희, 중앙산업 조성철, 현대 정주영, 벽산 조정구, 극동 김용산, 대림 이석구, 삼양사 김상홍, 무학 최재형, 쌍용 김성곤 등 당시 모든 재벌 이름이 올라가 있었다.
정경유착으로 재벌 반열에 오른 SK
- 선경은 이동통신사업자 선정에 이어 태평양 증권까지 인수하면서,(매각대금이 1,000억 원에서 3,000억 원 정도 한다던 태평양증권을 SK는 단돈 56억 원에 인수했다.) 노태우 정부에서 승승장구했다.
**4장 초등학생도 알 걸? 재벌, 네 가지만 지켜라**
그만큼 했으면 많이 먹었다. 부동산 투기는 그만하자
- 한미약품 사례의 실패... 참.. 사례 들면 망하고 사례 들면 망하고..
노동자의 삶이 나아져야 재벌들의 이익도 늘어난다
- 독일은... 취업하지 않아도 매달 20여만 원 정도의 수당을 지급하고, 취업에 실패한 청년들에게는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취업장려금을 지급했으며, 취업을 위해 직업학교나 연수를 받는 사람에게도 훈련수당을 지급했다.
- 프랑스는 구직활동과 직업교육 참여를 약속한 18~26세 청년들에게 우러 452유로(약 57만 원)의 보조금을 지급하는 '청년보장제도'를 시행했다.
번 만큼 세금 내라
체급에 맞는 선수들과 싸워라
- 한국의 자영업자 비율은 27.4%로(2013년 기준) OECD 평균치의 두 배에 육박한다. 한국보다 더 많은 자영업자 비율을 나타내고 있는 국가는 그리스, 터키, 멕시코인데, 이 세 나라의 공통점은 국가경제가 내리막에 있다는 것이다. 4위인 한국 앞에 왜 저들 국가의 이름이 올라가 있는지 의미심장한 조사가 아닐 수 없다.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라
- Onwer Risk
- 미국 S&P 500 기업의 65%가 전문경영 체제인데 반해 한국 기업의 전문경영체제는 채 20%가 되지 않는다.
- 미국의 프라이빗뱅킹 업체인 유에스트러스트(US Trust)에서 기업 가치가 미화 200만 달러를 초과하는 기업 242곳을 조사한 결과(2008년), 가족 소유 기업이 3세대 이상 살아남은 비율은 15%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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