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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현대인의 탄생_전우용_웅진씽크빅

by Whatever it is, it matters 2022. 6. 6.

# 현대인의 탄생_전우용_웅진씽크빅

독서일: 2020/01/01
비고: 2020년 6월 1일 오후 1:46
작가: 전우용
출판사: 웅진씽크빅

- 내가 이 책을 쓰면서 중점적으로 다루고 싶었던 것은 현대 의학 자체보다는 한국인이 현대 의학을 수용한 방식과 과정이었다.

1부 해방과 혼돈의 시대: 1945.8~1950.6

- 1945년 8월 15일 정오, 일왕 히로히토의 잘 들리지 않는 목소리가 일본 제국 전역의 라디오 전파를 타고 흘러나오는 순간, 한국인들은 식민 통치의 **질곡**에서 벗어났음을 알았다.
- 굴레는 동시에 질서이기도 했다. 굴레가 벗겨지는 그 순간, 식민지 사회를 지탱해 온 모든 질서가 함께 무너졌다.
- 쌀은 모든 '잡곡'에 대비되는 유일한 주곡, 그러면서도 아무나 먹지 못하는 주곡이었다.
- 고등교육기관의 교사는 태반이 일본인이었고 교재는 모두 일본어로 된 것들분이었으니, 더 배울 이유가 없었다. 새 교재가 나오고 새 교사가 충원될 때까지, 학생들은 그저 모여서 토론하거나 정치지도자들의 강연장에 따라다녔고, 그해 말 '신탁통치' 문제가 불거진 이후로는 상당수가 정당들의 '행동대원'으로 활동했다.
- 핵폭탄을 맞은 일본은 자기 나라의 '일등국민'들조차 보살피지 못했다. 중국 동북부는 국공내전의 와중에 있었다.
- 해방과 동시에, 거대한 인구이동의 파도가 한반도를 덮쳤다. 해방 무렵 한반도에는 군인을 빼고 75만여 명의 일본인이 있었다. 먼저 이들이 일본으로 귀환하기 시작했다. 이들 중에는 한반도에서 출생하여 일본 땅을 한 번도 밟아보지 못한 사람도 많았다.
- 뒤이어 자의로든 타의로든 해외에 나가 있던 한국인들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해방 무렵 해외 거주 한국인은 300만 명이 넘었다.
- 서울에는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르는 일자리를 찾기 위해 하루 종일 이곳저곳 기웃거리는 남녀들로 넘쳐났다. 서울은 부유하는 인간 군사의 도시였다.
- 연인원 150만 명이 몰려든 서울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공원과 다리 밑, 철도역과 방공호에 몸을 눕혀야 했다.
- 1946년 말, 전재원호본부는 직업 알선이 필요한 인구를 150만 명으로 추산했다.
- 길가에 시체가 널려 썩어가던 도시 환경은 미군 진주 직후 한두 차례 대청소로 일시 개선되었으나, 곧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 잘못 먹고 병든 사람은 그나마 먹을 것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 공출제가 일시 중단된 틈에 모리배들이 쌀을 매점매석하고는 쌀값이 오르기만 기다렸다. 시장에 쌀이 자취를 감췄고 쌀값은 하루가 다르게 폭등했다. 1946년 1월, 군정 당국은 '미곡수집령'을 공포했지만, 이미 수집할 수 있는 쌀은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고 가을 추수기까지 기다리기엔 굶주리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1946년 2월 25일 군정청은 미국과 유엔 구제부흥사업국에 긴급 구호식량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1948년 정부 수립 때까지 80만 톤 가까운 원조곡물이 도입되어 겨우 대중을 기근에서 구할 수 있었다.
- 결핵, 성병과 더불어 3대 '망국병'으로 꼽힌 것은 마약 중독이었다. 1949년 정부가 추산한 마약 중독자 수는 18만 5,000여 명으로 해방 직전의 두 배에 달했다.
- 기생충 감염은 한국인들에게는 풍토병 같은 것이었다. 해방 직후에는 이를 토질병, 또는 지방병이라고도 불렀다.
- **목숨을 위협하는 것들이 너무 많아져 삶과 죽음을 모두 가볍게 만들었다.**
- 해방 직후의 혼란 속에서 신생 보건후생부의 부담은 엄청났다. 보건 행정의 관점에서 볼 때, 이 무렵의 한국인은 거의 모두가 구호와 치료의 대상이었다. 탄생 1년 만에, 보건후생부는 17개의 국을 거느린 최대 규모의 행정부서가 되었다.
- 일반국민을 위한 국공립병원들이 공공성을 상실해가는 가운데, 상대적으로 '힘 있는' 정부 부서들이 독자적으로 병원을 세우기 시작했다. 본래 특수 분야인 군이 병원들을 신설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경찰과 교통부, 체신부도 자기 직원과 가족들을 따로챙기려 들었다. 조선총독부 철도국을 인계한 교통부는 철도병원을 운수병원으로 개칭하여 직원 우대 병원으로 계속 사용했고, 체신부도 서울에 국민보건병원을 직영했다. 경찰병원은 1949년 11월, 우연이라기엔 공교롭게도 서울 남대문로의 반민특위 건물에서 개원했다. 권력기반이 취약한 정부로서는, 국민 일반을 두루 보살피기보다는 공무원이라도 확실히 챙길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 이 땅에서 '의약 분업'은 아주 오랜된 관행이었다. 조선 후기 전통 의사들은 '약방문'이라는 처방전을 써주는 사람이었고, 환자는 약포에서 약방문에 따라 조제해 준 약을 집에 가져와 달여 먹었다. 처음 서양식 병원이 출현했을 때에도 사람들은 병원과 약방을 잘 구분하지 못했다.

2부 전쟁과 상처의 시대: 1950.6~1953.7

-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이 전격적으로 38선을 넘었다. 김일성은 남한 내 빨치산 세력과 아직 사회 곳곳에 남아 있는 좌익세력의 지원을 얻으면 미군이 본격 개입하기 전에 전쟁을 끝낼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의 기대대로라면 전쟁은 가을걷이 이전에 끝날 것이다. 그는 '인민들'이 '해방의 기쁨'을 햇곡식과 함께 누릴 수 있게 해주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역사상 어느 전쟁도 도발자의 예상대로 전개된 적은 없다.
- 때는 한여름이었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전개될 때까지 한 달여를 양측 군대는 무더위 속에서 강변 고지들을 빼앗기 위해 사투를 벌였다. 수시로 장맛비가 내렸고 낮 기온은 섭씨 30도를 훌쩍 넘었다. 총탄이나 수류탄 파편에 스친 상처는 금세 곪았고, 제때에 처리하지 못한 시체는 곳곳에서 악취를 풍겼다.
- 1951년 7월 10일 휴전협상이 개시되자 전투는 진지전 양상으로 바귀었다. 전선이 거의 고정됨으로써 보급문제는 해결되었으나 이번에는 참호 속의 벌레들이 병사들을 괴롭혔다. 해방 이후 대량의 DDT 살포가 반복된 탓에, 벌레들은 DDT에 내성을 키워둔 상태였다.
- 날씨보다도 부패와 탐욕이 더 무서웠다.
- 공식통계는 전쟁 중 한국군 전사자 13만 7,899명, 부상자 45만 742명, 실종 또는 포로가 된 자 3만 2,838명, 유엔군 전사자 4만 670명, 부상자 10만 4,280명, 실종 또는 포로가 된 자 9,931명으로 모두 77만 6,36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기록했다. 민간인의 경우 남한에서만 사망·실종자 67만여 명, 부상자 23만여 명이었고 전쟁으로 인한 장애자 33만여 명, 전쟁미망인 30만여 명, 전쟁고아 10만여 명이 생겼다. 공산군 측의 인명피해는 이보다 훨씬 많았다. 한국인과 미국인, 중국인과 그 밖의 참전국 병사들을 합쳐 200만 명 이상이 전쟁 중 죽거나 다쳤다. 폭격으로 집이 부서져 살 곳을 잃어버린 사람도 700만 명에 달했다.
- 누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염치와 양심의 값어치는 한없이 떨어졌다.
- 전쟁의 논리는 모든 것을 굴복시킨다.
- 후방안 안전한 지역이라기보다는 결핍의 지역이었다. 식량, 의복, 주거가 부족했을 뿐 아니라 의료 인력과 시설, 의약품도 부족했다. 전시는 '질병의 시기'이기도 했다.
- 1951년 8월 보건부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국민의 99퍼센트가 영양부족 상태였다.
- 미국은 이 전쟁이 '정의의 전쟁'으로 인식되기를 바랐다. 이 전쟁은 인도주의와 반인도주의, 자유와 억압, 민주주의와 전체주의, 문명과 야만이 어떻게 얼마나 다른지를 전 인류에게 명백히 제시하는 전쟁이어야 했다. 포로에 대한 충분한 급양과 치료는 '인도적 처우'여부를 판정하는 일차적 기준이었다.
- 1951년 6월경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포로는 15만 명 이상이었다. 포로수용소는 하나의 도시였고, 포로들은 스스로 행정조직을 만들어 그 도시를 관리했다.
- 포로들의 폭동과 테러는 경비 병력의 통제력을 무력화할 정도였다. 미군은 포로들을 너무 잘 먹여 '저항력'이 강해졌다고 한탄했다.
- 병원은 병사들에게 다쳐도 살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어야 했다. 기원전 1600년에 공포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집트 법령에는 '전투 중 다친 병사는 무료로 치료해야 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1585년에는 스페인 군대에 항구적인 군 병원이 최초로 설치외었고, 19세기 초 나폴레옹 전쟁 때 프랑스 군사는 앰뷸런스를 창안하고 전선 가까운 곳에 수술장을 두었다. 1883년 한성순보는 서양의 발달된 외과술이 병사들로 하여금 두려움 없이 싸울 수 있게 한다고 썼다.
- MASH(야전외과시설)는 지휘부, 지휘분견대, 수술 전 및 쇼크 관리부, 수술부, 수술 후 회복부, 약국, 엑스레이부, 병실부로 구성된다. TO상의 인원은 방산선과 1명, 마취과 2명, 내과 1명, 외과 6명, 일반 의무 4명 등 군의관 14명과 간호장교 12명, 의정장교 2명, 준사관 1명, 사병 95명으로 총원 124명이었다. 13개의 트럭과 11개의 트레일러, 텐트, 발전기와 이동 가능한 조립식 장비들이 배치되며, 60병상을 기준으로 했다.
- 전쟁이 발발한 뒤 6개월 만에, 10만 군인 중 군 병원에 입원한 환자는 5만여 명에 달했다.
- 그럼에도 국군 병원의 치료 성적은 예상 밖으로 좋았다. 전쟁 중 매년 10만 명 가까운 장병이 군 병원에 입원했는데, 병원 내 사망률은 평균 2.9퍼센트, 치료 후 원대복귀자는 40-70퍼센트였다.
- 응급환자는 대개 병원에 도착하기 전에 사망했다.
- 심장에 물이 차 숨을 쉬지 못하는 환자가 들어왔다. 일단 수술대 위에 눕혔으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책을 펴놓고 읽어가면서 수술했다. 서울의대를 갓 졸업하고 10군단 민사처 병원 의사로 있던 이정균의 회고다. 그는 나중에 권위있는 정신과의사가 되었다.
- 제1차 세계대전 때 처음 모습을 드러낸 입체전은 전방과 후방의 구분을 무의미하게 했다. 비행기는 넓은 지역에 흩어져 있는 상대편 병사들의 움직임을 하늘에서 관찰했으며, 곡사포는 전선을 가로질러 상대방의 후방을 공격했다. 철도와 내연기관이 달린 수송수단은 전선과 후방사이의 시간적 거리를 단축시켰고, 무전기와 전보는 전황을 군 지휘부뿐 아니라 국내 전역의 일반국민들에게까지 '실시간'으로 전달했다. 전쟁으로 인한 인적, 물적 피해와 심리적 긴장감에서, 전방과 후방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가 사라졌다.
- 38선은 형식적인 전선에 불과했다. 적과 아를 나누는 경계선은 본래 선명할 수 없는 이념이었다. 이념으로 전선을 그음으로써, 적은 경계선 밖이 아니라 주위 어느 곳에나, 심지어 자기 자신 안에도 존재할 수 있는 불확실한 대상이 되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기 이념을 검증받고 스스로 검증해야 했다.
- 전쟁 중에도 부자들은 많았다. 특히 원칙적으로 군인, 공무원, 기타 필수요원만 거주할 수 있었던 부산에는 '엄청난' 의료비도 주저 없이 지불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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