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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문재인의) 운명

by Whatever it is, it matters 2022. 6. 6.

# 운명

Tags: 2017
, 6, 도서, 리디북스, 발췌
독서일: 2017/06/05 오후 2:18
비고: 2017 6 5일 오후 2:18
작가: 문재인
출판사: 가교

- 10
월 유신은, 법대생에게는 더더욱 황당한 일이었다. 유신헌법이 만들어지자 기존의 법전과 교과서들이 무용지물이 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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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부민협을 할 때, 리영희 선생 초청강연회를 두 세번 한 적이 있다. 뒤풀이 자리에서 내가 리영희 선생에게 질문했다. "중국의 문화대혁명을 높이 평가했던 것이 오류가 아니었는지"라고. 그는 망설임 없이 분명하게 대답했다. "오류였다. 글을 쓸때마다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무척 노력했는데, 그 시절은 역시 자료접근의 어려움 때문에 한계가 있었던 것 같다. 또 그 때는 정신주의에 과도하게 빠져있었던 것 같다." 그 솔직함이 참으로 존경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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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대한 훈련소는 향토사단이라는 창원 39사단이었다. 1975 8월 초였다.
- '
문재인, 특전사령부!'라고 발표됐다. 특전사가 공수부대라는 걸 알게 된 것은 용산으로 가는 군용열차가 삼랑진을 지날 무렵이었다. 특전사령부 예하 제1공수 특전여단 제3대대에 배치됐다.
- 6
주간의 특수전 훈련을 마칠 때 정병주 특전사령관으로부터 폭파과정 최우수 표창을 받았다. 정 사령권은 나중에 12·12 신군부 쿠데타때 끝까지 저항하다가 반란군의 총에 맞아 참군인의 표상이 된 인물이다. 전두환 여단장은 그 쿠데타를 이끌고 성공해 대통령까지 됐다. 관등성명을 외웠던 두 직속상관의 운명이 그렇게 극적으로 엇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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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2주씩 바다에서 수중 침투훈련을 했다. 첫 해에 바로 인명구조원 훈련을 받고 대한적십자사로부터 고급 인명구조원 자격도 취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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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 전전하며 고시공부를 계속했다. 한곳에 오래 있으면 익숙해져서 안일해지고 사람들과 어울리게 된다. 긴장을 유지하려고 일부러 몇 달에 한 번씩 장소를 옮기곤 했다. 늘 저렴한 곳을 찾아다녔다.


-
농장으로 가는 진입로 입구의 버스정류장에서 우리 일행이 내리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5~6명의 건장한 괴한이 둘러싸며 권총을 들이댔다. 그리고 "꼼짝 마. 손들어. 너 문재인 맞지?"라고 소리쳤다. 나를 체포하기 위해 기다리던 청량리경찰서 정보과 형사들이었다. "영장을 보자"고 했더니 "영장 같은 소리 하고 있네!"하면서 '계엄'이라고 붉은 글씨로 적힌 '계엄증'을 보여줬다. 비상계엄 하에서 영장제도가 정지되니 군소리 말라는 뜻이었다. 처가 식구들이 다 보는 앞에서 수갑이 채워지고 차에 태워져, 그 길로 청량리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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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된 지 이십삼, 사일쯤 됐을까, 뜻밖의 낭보를 받았다. 반가운 소식을 가장 먼저 들고 온 사람은 아내였다. 내가 사법시험에 합격했다는 것이다. 그 며칠 후 석방이 됐다. 군사재판에 이미 회부됐다면 석방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합격도 취소되거나 3차 시험 불합격으로 처리되고 말았을 것이다. 다행히 미결상태였기 때문에 석방의 여지가 생겼다. 그 사법시험에서 경희대 합격자는 단 두 명이었다. 그 중 한 명이 합격이 취소될 상황이라 학교 측은 총력을 기울여 구명노력을 했다고 한다.

 

- 20031 13, 이호철과 함께 당선인을 다시 만났다. 그 모임을 어찌 알았는지 어느 지방신문이 보도를 하기도 햇다. 사직동 근처의 어느 한정식 집이었다. 당선인은 무거운 얘기를 꺼냈다. 나에게 청와대 민적수석비서관을 맡아달라고 했다. 달리 맡길 만한 사람이 없다는 말씀이었다. 이호철에게도 무슨 일이든지 맡아서 도와달라고 했다.- 즉답을 할 수 없었다. 며칠 시간을 달라고 부탁드렸다. 이호철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반응이 떨떠름하고 미지근하게 보였던지, 당선인은 "당신들이 나를 정치로 나가게 했고, 대통령을 만들었으니 책임져야 할 것 아니냐"는 말씀까지 했다. 내려와서 1주일정도 고민했다. 나는 인권변호사란 말을 들으면서 권력을 비판하는 역할만 해 왔을 뿐, 국정운영 경험이나 행정경험이 전혀 없었다. 법률가로서 법을 알뿐 국정에 관해서는 백면서생이나 진배없었다. 정치세계도 알지 못했고, 관여해 본 일도 없었다. 부산 선대본부장을 했지만, 민주당에 입당하지 않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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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처음에 청와대 민정수석쯤 되면 청와대 근처에 관사 같은게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경호실 직원들은 직원용 아파트가 있었으나, 비서실 쪽은 비서실장만 공관이 있을 뿐 그 밑에 직급은 관사 같은 게 전혀 없었다. 할 수 없이 세를 얻어야 했다. 마당이 100평 넘는 부산의 집을 팔아도 강남 30평 아파트 전세 값이 안됐다. 평창동의 조그만 연립주택에 세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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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래도 변호사라 저축도 약간 있고 해서 감당할 수 있었다. 지방에서 대학교수 하다가 올라온 허성관 장관이나 권기홍 장관 같은 분들은 서울에 전세 구할 돈이 없어 고생했다.

 

- (생활리듬이 깨졌다) 회의에서도 담당분야를 벗어난 논의를 지켜보노라면 졸음이 밀려오기 일쑤였다. 임기 첫해, 문희상 비서실장과 유인태 정무수석이 회의 때 자주 졸기로 유명했다. 문희상 실장은 당시 알레르기 약을 먹고 있어서 자주 졸았다. 유인태 수석은 옆에서 보기엔 분명히 졸았던 것 같은데, 본인은 눈만 감고 있었을 뿐이라고 늘 우겼다. 그러면서도 회의에서 논의된 내용을 정확하게 꿰고 있는 걸 보면 놀라웠다.

 

- 특히 첫 1년 동안 건강이 많이 상했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안 해본 생활, 안 해본 일에, 잘해보려는 의욕과 긴장 때문에 다들 건강이 많이 상했다. 게다가 대통령이 일중독이라 할 정도여서, 일에서 만큼은 아랫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거의 없었다. 버틸 사람이 없었다. 1년쯤 되자 다들 지쳐서 나가 떨어졌다.
- 2003
3 6, 정부출범 직후에 법무부가 고검장 인사를 단행했다. 검찰은 조직적으로 반발했다. 언론은 "검란", "집단항명"등으로 표현했다. '대통령과 검사와의 대화'자리가 마련된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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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가 시작됐는데, 이건 목불인견이었다. 젊은 검사들은 끊임없이 인사문제만 되풀이해 따지고 물었다. 한 사람이 인사 문제에 대해 질문해서 대통령은 충분히 설명했는데, 다음 발언자가 이미 정리하고 넘어간 문제를 똑같이 반복했다. 대통령은 같은 얘기를 계속 반복해야 했다. 인사 불만 외에, 검찰 개혁을 준비해와 말한 검사는 없었다. 오죽했으면 '검사스럽다'는 말까지 나왔을까.

 

- 중수부 폐지를 본격 논의하기 전에 대선자금 수사가 있었다. 그 수사를 중수부가 했다. 대통령이나 청와대는 검찰이 정권 눈치 보지 않고 소신껏 수사할 수 있게 보장해 줬다. 이 수사로 검찰이 국민들로부터 대단히 높은 신뢰를 받게 됐다. 그 바람에 중수부 폐지론이 희석됐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중수부 폐지를 추진하게 되면 마치 대선자금 수사에 대한 보복 같은 인상을 줄 소지가 컸다. 그 시기를 놓치니 다음 계기를 잡지 못했다. 아쉬운 대목이다. 그렇게 하면서까지 지켜준 검찰의 정치적 중립이며 독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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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명박 정부 들어서자 마자 그들은 순식간에 과거로 되돌아가 버렸다.
-
나는 주례 대면보고와 독대보고를 없앤 대통령의 조치를 지지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조치가 국정원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국정원장의 조직 장악력을 떨어뜨리지 않을까 염려됐다. 국정원 내부에서 대통령이 관심을 가지지 않는 정보보고를 계속 해야 하느냐는 동요의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국정원장의 직접 보고를 받지 않는다는 것은 정보기관의 존립의미를 상실한 것처럼 여기는 인식이 국정원 내부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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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도 주례보고와 독대보고를 받지 않겠다는 것일 뿐, 보고 할 일이 있을 경우 언제든지 관련 수석등의 배석하에 보고를 받겠다고 했다.

 

- 감사원 지휘기능을 아예 국회로 넘기는 방안도 검토했다. 역시 대통령 생각이었다. 미국의 경우 의회 산하에 감시기구를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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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파병요청을 하면서, 공식적으로는 규모를 이야기 하지 않았다. 물밑으로 말하는 규모는 5~7천 명 선의 전투보병이었다. 외교·국방·안보라인은 한술 더 떠서 '1만 명 이상의 전투병을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적어도 사단급 규모가 돼야 독립된 구역을 맡아 독립된 작전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안 그러면 미군 밑에 예속돼 미군의 지휘를 받게 된다고 했다. 반면 청와대 내의 정무분야 참모들은 파별을 반대했다. 나도 반대였다. 정의로운 전쟁이라고 보기도 어렵고, 파병했다가 희생 장병이 생기게 되면 비난여론을 감당하기 어렵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통령 생각도 다르지 않았다. 개인적으로는 파병을 마땅치 않아 하는 입장이었다. 파병을 반대하는 우릳르 주장을 백 번 수긍하고 공감했다. 그러나 그때 한국은 북핵 위기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미국의 협조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상황이었다.

 

- 대통령의 고민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NSC사무처 이종석 차장이 묘안을 내놨다. '미국의 파병요구를 받아들이되, 파병규모는 최소한으로 한다. 파병은 비전투병 3천 명으로 한다. 파병성격도 전투작전 수행이 아니라 전후재건사업 지원이다.' 이런 방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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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고 고통스런 결정이었지만, 파병을 계기로 북핵문제는 대통령이 바라는 대로 갔다. 미국의 협조를 얻어 6자회담이라는 다자 외교 틀을 만들어냈다. 6자 회담을 통해 북핵문제를 대화를 통한 외교적 방법으로 풀어갈 수 있었다. 한때 북폭까지 주장했던 네오콘의 강경론을 누그러뜨리면서 위기관리를 해 나갈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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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종금사건: 2조원 대의 공적자금 투입을 유발하고 퇴출된 나라종금의 대주주 김호준 전 보성그룹 회장이 안희정씨와 염동연씨 등에게 퇴출 전인 1999년 무렵 로비 자금을 전달했다는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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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예고 없는 기자회견은 원고조차 준비되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대통령의 말은 폐부를 찔렀다. "최도술은 약 20년 가까이 저를 보좌해왔고, 최근까지 저를 보좌했습니다. 수사결과 사실이 다 밝혀지겠지만 그 혐의에 대해 제가 모른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에게 잘못이 있으면 제가 책임을 지겠습니다. 국민여러분들께 사죄합니다. 아울러 책임을 지려합니다. 수사가 끝나면 그 결과가 무엇이든 간에 이 문제를 포함해 그 동안 축적된 국민들의 불신에 대해 재신임을 묻겠습니다. 저는 모든 권력적 수단을 포기했습니다. 도덕적 신뢰 하나만이 국정을 이끌어갈 수 있는 밑천일 뿐입니다. 그 문제에 적신호가 왔기 때문에 이제 국민들에게 겸허히 심판받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 스스로 이 상태로 국정을 운영해 가기는 어렵습니다. 언론 환경도 나쁘고, 국회환경도 나쁘고, 지역적 민심환경도 안 좋습니다. 이 많은 것들을 극복해 나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권력에 대한 단순한 욕심이 아니라 내가 하는 일에 대한 도덕적 자부심입니다. 지금 최도술 전 비서관 사건으로 해서 빚어진 문제는 제가 그런 자신감을 가지고 국정을 힘차게 추진해 나가기에 상당히 어려운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 대통령이 담배를 권하기도 하고, '문 수석, 담배 한 개비 주지'하며 내 담배를 가져가시기도 하니, 함께 피우지 않을 수 없엇다. 대통령도 늘 여사님으로부터 잔소리를 듣는 처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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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했다. 나부터 개업신고를 냈다. 청와대 들어가면서 변호사를 휴업한 상태라, 부랴부랴 다시 변호사 재개업 신고를 했다. 나로선 노무현 변호사의 대우조선사건구속 이후, 의뢰인과 변호인의 인연으로 이어진 게 두 번째였다. 내가 서울 변호사가 아니라 사무실도 없었다. 서초동에 임시 사무실을 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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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할 분담을 했다. 유현석 변호사께서 좌장역할을 맡았다. 한승헌 변호사가 총괄을 자임했다. 나머지 분들은 논점별로 분야를 나눠맡았다. 어떤 분야는 이용훈 변호사, 또 어떤 분야는 박시환 변호사 식으로 역할을 나눴다. 나눠 맡은 논점별로 연구도 발제도 서면도 직접 작성했다. 법정변론도 분담했다. 재판 때마다 발언할 대리인의 수와 순서발언할 내용, 돌발적인 상황에 대한 대응 등 세부적 부분까지 모두 의논해 재판에 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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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일 시청 앞 도로를 가득 메운 촛불 인파는 장엄했다.

 

- 대통령은 오랜 유폐생활로 지치고 마음이 불편했을 텐데도 유머를 잃지 않았다. 환담 끝날 무렵에 내가 대통령께 "마지막으로 대리인단에게 당부하실 말씀이 있으면 하시라"고 했다. 대통령이 벌떡 일어나 "저 대통령 다시 하게 좀 해 주십시오"라며 인사를 했다. 무거운 자리일 수도 있었는데, 일행 모두가 웃으며 헤어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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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재판 도중인 4 15, 17대 국회의원 총선이 있었다. 나는 선거 막바지에 부산지역의 몇몇 선거구에서 유세를 지원했다. 선거결과 열린우리당이 전체 299석 중 152석을 석권해 단독으로 원내 과반수 정당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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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에 대한 무서운 민의의 심판이었다. 나는 이 총선 결과야말로 헌재의 탄핵재판 결정에 쐐기를 박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5 14, 드디어 헌재결정이 내려졌다. 기각이었다. 슬픈 일도 있었다. 대리인단의 좌장 역할을 하셨던 유현석 변호사가 최종변론 후 쓰러져서,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5 25일 타계하셨다. 평생을 인권변호사로 살다 탄핵재판에 마지막 불꽃을 사르셨다.

 

- 다시 민정수석을 하는 동안 참여정부에서 갖아 아팠던 일이 있었다. 대통령의 대연정 제안이었다. 지역구도 타파를 위한 선거제도 개혁이란 전제가 달려 있긴 했지만, 한나라당과 연정하고 한나라당에게 내각구성 권한을 넘겨줄 수도 있다는 대통령의 제안은 탄핵반대 촛불을 거쳐 열린우리당을 다수당으로 만들어 준 우리측 지지자들을 경악시켰다. 시민사회진영도 허탈해했다. 호남지역에서는 아예 호남에 대한 배신이라고 했다. 나를 비롯해 참모들도 반대했던 일이어서, 대통령의 진정성을 말하며 옹호하려 나섰지만 감당이 되지 않았다. 우리 스스로도 설득되지 않으니, 다른 사람을 설득할 수가 없었다. 대통령도 나중에 참여정부 기간 중의 가장 큰 실책이었다고 인정했다.
-
대통령이 일관되게 주장했던 것은, 지역구도 타파를 위한 선거제도 개혁이었다. '총리결정 권한', '내각구성 권한', '연정'같은 것은 그렇게 될 경우 자신의 권한을 양보할 용의를 밝힌 것으로서, 선거제도 개혁을 촉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치권은 노 대통령의 거듭된 선거제도 개혁요구에 아무 답이 없었다.
- 10
월에는 검찰이 동국대 강정구 교수 국가보안법 위반사건 수사에 나섰다. 수사도 할 수 있고, 혐의가 있으면 기소도 할 수 있는 것이지만, 문제는 구속영장을 청구하려는 방침이었다. 천정배 법무부장관이 김종빈 검찰총장에게 불구속 수사를 지시하는 수사지휘권을 발동했다. 법무부장관은 구체적 사건에 대해서는 검찰총장만을 지휘·감독한다는 검찰청법 규정에 따른 것이었다. 천 장관의 수사지휘권 발동은 그 사건이 불구속 수사가 타당하다는 판단을 넘어, 우리의 형사사법 절차가 형사소송법 정신에 따라 불구속 수사원칙으로 가야 한다는 소신에 따른 것이었다. 그 사건이 불구속으로 수사되느냐 여부가 불구속 수사원칙으로 가는데 중요한 분수령이 된다고 본 것이었다. 그런데 김 총장이 장관의 수사지휘권 발동에 항의해 사표를 제출했다. 나중에 검찰총장이 된 당시 정상명 차장 등 여러 사람이 만류하고, 나도 설득했지만 끝내 고집을 꺾지 않았다. 참여정부에 적대적인 언론들은 그를 영웅처럼 다뤘다.

 

- 검찰총장 입장에선 누가 물밑에서 압력을 가해, 자신이 받아들이기 힘든 일을 강요했다면 과감하게 내용을 공개하고 옷을 벗을 수도 있다. 그게 검찰의 정치적 중립을 위해 필요하다. 하지만 천 장관은 공개적으로 그리고 공식적으로 절차를 밟았다. 검찰총장은 자기 소신과 달라도 법무부 장관 지시에 의해 처리하는 게 절차다.
- '
과거사위원회' 5년 간 모두 8,000여 건에 대한 진실을 규명했다. 항일독립운동과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 집단희생사건, 국외 동포사, 반민주적·반인권적 행위에 의한 인권유린, 폭력·학살·의문사 등이 규명대상이었다. 특히 한국전 당시 좌익운동 관련자 수천 명을 대량 학살한 '보도연맹사건'조사와, 한국전 전후 민간인이 적법절차 없이 전국적으로 군경에 희생된 사실을 모두 밝혀냈다. 좌익 또는 인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건들도 규명했다. 묻혀있던 역사적 진실을 찾아내는 데 큰 성과를 거뒀다.
- 4·3
사건: 1948 4 3일부터 1954 9 21일까지 제주도에서 일어난 민중항쟁. 일본 패망 후 한반도를 통치한 미군정 체제의 사회문제와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과정에서 발생. 미군정과 군경이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는 과정에서 많은 양민이 억울하게 희생. 희생자 통계는 확실하지 않지만 2 5~ 3만 명으로 잠정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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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비서실장: 대통령 임기 마지막 해인 2007 3, 다시 대통령이 불렀다. 참여정부 청와대 마지막 비서실장을 맡게 됐다. 청와대에 세 번째로 들어가게 됐다. 진심으로 맡고 싶지 않았다. 마지막 비서실장은 퇴임 후까지도 생각해야 하는 자리임을 잘 알고 있었다. 솔직히 이제는 자유롭고 싶고, 내 자리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대통령의 정치적 상황이 워낙 어려웠다. 이미 정권교체가 뻔히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그럴수록 마무리가 중요했다. 말년에는 인사 자체가 힘든 법이다. 대통령이 다른 선택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 우짜겠노. 대통령과 마지막을 함께 하자'고 생각했다.

 

- 대통령은 당청분리에 대해 처음부터 투철했다. 철학이기도 하고 공약이었기 때문에 반드시 준수해야 한다는 의지가 강했다. 당청분리의 핵심은 당직자 임명권, 공천권을 다 놓겠다는 것이다. 대통령은 중요한 평당원으로 남겠다고 했다. 약속대로 당직 임명이나 공천, 당론결정, 당의 입법 결정에 일체 관여하지 않았다. 대신 당과 정부와 청와대 간의 정책협의, 입법 협의는 당정청 또는 당청회의를 통해 게을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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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대통령도 당청분리에 대해 '우리 현실에서 시기상조가 아니었나'하는 후회를 조금했다. 나는 그 때나 지금이나 회의를 갖고 있다. 나는 그 때난 지금이나 회의를 갖고 있다. 열린우리당은 탄핵 역풍에 힘입어 다수당이 됐고 처음엔 과반을 넘기도 했지만, 효율적이지 못했다. 강력하지도 못했다. 개혁을 위한 입법이나 정책수립에 일사불란하지 못했다. 보다 과감하고 속도 있는 개혁을 위해서는 여당과의 공조가 반드시 필요했다는 후회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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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4, 18대 국회 개원과 동시에 개헌을 추진하겠다는 여야 각 당의 합의에 따라 대통령은 개헌제안을 철회했다. 그러나 18대 국회는 그 합의를 지키지 않았다. 그 점을 지적하는 언론도 없었다. 참으로 이상한 정치권, 이상한 언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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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은 줄곧 '장사꾼 논리'를 강조했다. "100% 국익 기준으로 하라. 우리가 이익이 되면 하고 그렇지 않으면 안 하는 거다. 협상과정에서 국익에 배치되면 안 해도 좋다. 조건이 맞지 않으면 언제든 중단해도 좋다." 이 점을 늘 강조했다. 대통령의 이런 접근법은 협상단에 큰 힘을 실어줬다. 배짱과 배포로 협상을 하게 만든 것이다. 대통령은 중동 순방을 떠나기 전날에도 협상팀을 불러 "협상이 되면 물론 좋지만 안 돼도 내가 책임 지는 거고, 돼도 내가 책임지는 거다. 본부장은 철저하게 장사꾼 논리로 협상하고 한·미 동맹 관계나 정치적 요소들은 절대로 의식하지 마라. 모든 정치적인 책임은 내가 진다"라고 역설했다.

 

- 비서실장을 하는 동안 가장 큰 일은 2007 10월의 남북정상회담이었다. 참여정부의 남북정상회담 기본 원칙은 국정원, 통일부 등 대북관련 공식기구를 통해서 공식적으로 추진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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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은 정동영 전 의장에 대해 사실 각별한 애정과 기대를 갖고 있었다. 당신과의 대선 경선 레이스에 마지막까지 함게해 줬던 그의 모습을 늘 고맙게 기억하고 있었다. 뭐든 도움을 주려 했다. 정 전 의장이 장관을 할 때든 당 의장을 할 때든 청와대 참도들에게 그를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최대한 도우라고 각별히 챙기곤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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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은 열린우리당이 깨지는 것을 아주 가슴 아파했다. 당신의 정치인생의 실패로까지 생각했다. 대통령이 가장 아프게 생각한 것은 대선 패배가 아니었다. "힘이 모자라거나 시운이 안되면 패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패배하더라도 우리의 가치를 부둥켜안고 있어야 다음의 희망이 있는 법이다. 당장 불리해 보인다고 우리의 가치까지 내버린다면 패배는 말할 것도 없고, 희망까지 잃게 된다"는 것이 대통령의 생각이었다. 당시 우리 진영이 열린우리당을 깨고 나간 일을 대통령은 그렇게 봤다. 대통령은 "계산하지 않는 우직한 정치가, 길게 보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도 가장 좋은 길"이라고 늘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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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이 옳음을 스스로 증명하기도 했다. 길게만 보면, 국민들 눈에는 뻔히 보이는 이치인데 정치하는 사람들이 왜 그걸 보지 못하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대통령은 또 이런 강조를 늘 했다. "대선에서 질 수도 있다. 이기면 좋지만 늘 이길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러나 패배하면 패패하는 대로 다음에 대한 희망을 남기는 패배를 해야 한다. 그러려면 대의나 원칙을 지키면서 대선에 임해야 한다. 특히 명분을 버리면 안 된다. 대의도 원칙도 명분도 다 버리고 선거에 임하면 이기기도 어렵고, 패배 후의 희망까지 잃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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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 덕분에 대통령도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았다. 환영행사에서 대통령은 인사 말 끝에 크게 외쳤다. "~~ 기분 좋다!" 나도 속으로 소리를 질렀다. ', 나도 해방이다!'

 

- 봉하에 자리를 잡은 대통령도 농군으로 잘 지내고 계셨다. 양산에 있으면서 가끔 들렀다. 대통령이 누군가 예방을 받을 때 격식을 갖출 필요가 있으면 가서 배석을 하고, 무슨 공식행사에 갈 때는 수행도 했다. 그럴 때는 배석하는 사람도 있어야 대통령도 체면이 설 것 같아 봉하에서 요청하면 언제든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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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때마다 좋았다. 마을을 찾는 방문객들이 날이 갈수록 늘고 있었다. 그들은 소리를 질러가며 대통령을 집밖으로 불러내 환호하고 사진을 찍으며 좋아했다. 대통령은 하루에도 몇 번씩 집밖으로 불려 나갔다. 방문객들에게 인사하는 일을 고달파했지만 그러면서도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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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가장 많은 기록물을 남기고 이관한 대통령을 '기록물을 빼돌린 파렴치한 사람'으로 몰아가는 코미디가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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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에 도착했다. 이인규 중수부장이 대통령을 맞이하고 차를 한잔 내놓았다. 그는 대단히 건방졌다. 말투는 공손했지만 태도엔 오만함과 거만함이 가득 묻어 있엇다. 중수1과장이 조사를 시작했다. 대통령은 차분하게 최선을 다해 꼬박꼬박 답변을 했다. 대통령의 절제력이 놀라웠다. 검찰의 조사를 지켜보면서 검찰이 아무 증거가 없다는 걸 거듭 확인할 수 있었다. 박연차 회장의 진술 말고는 증거가 없었다.

 

- 나중에야 들었다. 서거 직전 마지막 주말을 혼자 지내셨다. 끝가지 손에서 놓지 않으려고 했던 「진보의 미래」라는 책 저술도 포기하셨다. 19일 오전에 함께 저술 작업을 했던 윤태영, 양정철 비서관 등에게도 그 동안 고생했다며 모든 일을 놓았다. 여러 사람을 만난 것은 그게 마지막이었다. 21일 저녁 동네에 사는 친구 이재우 조합장이 잠시 들른 걸 제외하면 19일 오후부터 23일 새벽까지 그 누구도 만나지 않으셨다. 전날, 사저 안에 비서관들이 있는 공간으로 직접 담배를 가지러 잠시 들르셨다. 마치 마지막 작별이라도 하듯 그들을 한동안 물끄러미 보시곤 아무 말씀도 없이 나가셨다. 그리고 23일 새벽 집을 나서, 그 먼 길을 떠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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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서 전문을 공개하고 기자들에게 배포하라고 김경수 비서관에게 시켰다. 출력해서 가지고 온 최초 원본은 여사님께 보여드린 후 품에 넣어뒀다. 나는 지금도 그분의 유서를 내 수첩에 갖고 다닌다. 별 이유는 엇다. 그냥 버릴 수가 없어서 그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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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대통령은 정부 측의 거부로 영결식에서 추모사를 할 수 없게 되자, 영결식 전날 불편한 몸으로 휠체어를 타고 서울역 분향소를 방문해 추모 말씀을 하셨다. 그 뿐 아니었다. '오마이뉴스' 오연호 대표가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라는 책을 낼 때, 영결식장에서 하지 못한 마음의 추모사를 추천사로 써 주시기까지 했다. "노무현 당신, 죽어도 죽지 마십시오"로 시작해서 "우리가 깨어 있으면 노무현 전 대통령은 죽어도 죽지 않습니다"로 끝나는 간절한 추모사였다. 이제 고인이 되신 김대중 대통령님께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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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아내도 박석 하나를 신청했다. "편히 쉬십시오" 단 한 줄을 남겼다. 그 분에게 드릴 말씀이라곤 그 것밖에 없었다. 서거하신 것에 대한 비통한 마음이야 다른 분들이 다 담으셨을 것이고, 나까지 보탤 게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냥 그 분이 대통령 재임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참으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낸 게 한 스러웠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야말로 대통령의 안식을 바라는 마음 말고는 없다.

 

- 개혁입법이 중요한 시기에 법사위원장을 야당에게 넘겨준 국회원 구성 협상의 잘못이 있었다. 직권상정을 하지 않는 우리 쪽의 '양심'도 개혁입법을 밀어붙이지는 못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런 사정으로 폐지가 어렵다면, 우선 남용되는 조항이라도 개정하는 방안을 강구해 봤어야 했다. 그런데도 우리 진영의 근본주의가 그런 타협을 용납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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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진영이 영원한 소수파로 머물지 않으려면 국가에 대해, 그리고 국가 경영에 대해, 나아가서 외교·안보문제에 대해서까지도 더 책임있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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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조 선생님들을 만날 때마다 붙잡고 이야기를 했다. "더 중요한 개혁과제가 얼마나 많습니까. NEIS 하나 갖고 그렇게 흔들어 버리면 장관이 힘이 빠져서 다른 개혁도 못하게 됩니다. 그렇게 장관을 밀어내면 앞으로는 개혁적인 장관을 모시기가 어렵게 되고, 점점 더 안정적인 사람을 선택하게 되기 마련입니다. 교육개혁이 물건너가는 겁니다." 다들 내 말에 공감했다. 집행부의 걍퍅함을 걱정하는 선생님들도 많았다. 하지만 그걸로 그만이었다. 조직으로 돌아가면 조직의 논리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 노동 쪽에 더 호의적인 참여정부 시기에 더 높은 목표를 잡고, 더 많이 밀어붙여서, 더 많은 성과를 내고자 하는 욕심 때문이었을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그런 노동계의 조급함이 결과적으로 참여정부 입지를 약화시킨 게 사실이다. 그리고 노동계의 무리한 요국가 오히려 개혁을 가로 막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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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정부가 애를 써도 5년 임기 동안에 해낼 수 있는 것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 보수진영은 개혁과 복지한다고 공격하고, 진보·개혁진영은 제대로 못한다고 공격하고, 그렇게 좌우 양쪽에서 협공을 받는 정부 역시 참여정부의 전철을 되풀이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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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한가운데에 노무현 변호사와의 만남이 있었다. 그는 나보다 더 어렵게 자랐고 대학도 갈 수 없었다. 어려운 사람을 대하는 마음이 나보다 훨씬 뜨거웠고, 돕는 것도 훨씬 치열했다. 그를 만나지 않았으면 적당히 안락하게, 그리고 적당히 도우면서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의 치열함이 나를 늘 각성시켰다. 그의 서거조차 그러했다. 나를 다시 그의 길로 끌어냈다. 대통령은 유서에서 '운명이다'라고 했다. 속으로 생각했다. 나야 말로 운명이다. 당신은 이제 운명에서 해방됐지만, 나는 당신이 남긴 숙제에서 꼼짝하지 못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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