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야기]
그런데 막상 두껑을 열어보니 <함정과 진자>가 나의 첫 베스트셀러였다. 나는 인쇄한 책들을 전부 책가방에 넣어 학교에 가져갔는데, 그날 정오쯤에는 벌써 스무 권 남짓 팔아치운 뒤였다.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이 되자 벽속에 갇힌 여자('그들은 그녀의 손끝에 허옇게 뼈가 드러난 것을 보고 경악했다. 그녀는 탈출하려고 미친 듯이 벽을 긁으며 죽어 간 것이었다.')에 대한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면서 판매량이 서른 여섯 권으로 늘어났다. 책가방 속에 도합 9달러나 되는 동전이 묵직하게 들어 있었고 나는 꿈 속을 헤매는 기분이었다. 갑자기 이런 거금을 만져보게 되다니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너무 신나는 일이어서 현실이 아닌 것 같았다.
처벌 기간이 끝나고 겨우 일주일이 지날 무렵, 나는 또다시 교장실로 불려가게 되었다. 무거운 마음으로 걸어가면서 이번엔 또 무슨 똥을 밟았을까 생각했다.
그는 나에게 노란 타자용지를 잔뜩 주면서 - 아직도 어딘가에는 이 종이가 남아 있을 것이다 - 한 낱말당 0.5센트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누가 나에게 글을 쓰면 돈을 주겠다고 말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두 건의 기사를 제출하던 그날, 굴드는 그 밖에도 흥미로운 조언을 해주었다. 글을 쓸 때는 문을 닫을 것, 글을 고칠 때는 문을 열어둘 것. 다시 말해서 처음에는 나 자신만을 위한 글이지만 곧 바깥 세상으로 나가게 된다는 뜻이었다. 일단 자기가 할 이야기의 내용을 알고 그것을 올바르게 - 어쨌든 자기 능력껏 올바르게 - 써놓으면 그때부터는 읽는 사람들의 몫이다. 비판도 그들의 몫이다. 그리고 작가가 대단히 운 좋은 사람이라면(이것은 존 굴드가 아니라 나의 생각이지만 아무 굴드도 이렇게 믿었을 것이다) 그의 글을 비판하고 싶어하는 사람들보다 읽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
<야간 작어반>이라는 단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나로서는 늦은 봄날 오후에 시간을 죽이기 위한 일이었다.
<태양의 계절 A Raisin in the Sun>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한 남자가 소리친다. '나는 날고 싶어! 태양을 만지고 싶어!' 그러자 그의 아내가 이렇게 대꾸한다. '먼저 계란이나 다 먹어요'
"너도 언젠가는 결혼하게 될 거나, 스티븐. 그런데 센 강변의 다락방이 낭만적으로 보이는 건 총각일 때뿐이야. 그런 데서 가정을 이룰 수는 없잖니."
우리들이 살아 있다는 것을 기억해주는 것은 가스 회사와 전기 회사뿐이었다.
그 시절의 우리에게는 행복한 일도 많았지만 걱정 근심도 많았던 것 같다. 우리 자신도 (흔히들 말하듯이) 어린애보다 나을 것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사랑을 나누는 동안에는 돈 문제를 잊을 수 있었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아이들과 서로를 보살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태비는 분홍색 유니폼을 입고 던킨 도너츠에서 일했으며, 커피를 마시러 들어온 술꾼들이 소란을 피우면 경찰을 불렀다. 나는 모텔 침대보와 수건 따위를 빨면서 공포 영화 대본을 썼다.
[글쓰기]
설령 그렇더라도 그냥 문학을 옹호하기로 하자.
결혼하고 싶은 여자가 있어서 글쓰기를 시작할 수도 있고,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어서 시작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그러나 경박한 자세는 곤란하다. 다시 말하겠다. '경박한 마음으로 백지를 대해서는 안 된다.'
[1] 연장통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글쓰기에서도 자기가 가진 최선의 능력을 발휘하려면 연장들을 골고루 갖춰놓고 그 연장통을 들고 다닐 수 있도록 팔심을 기르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놓으면 설령 힘겨운 일이 생기더라도 김이 빠지지 않고, 냉큼 필요한 연장을 집어들고 곧바로 일을 시작할 수 있다.
자주 쓰는 연장들은 맨 위층에 넣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쓰는 연장은 글쓰기의 원료라고 할 수 있는 낱말들이다. 이 경우에는 여러분이 이미 갖고 있는 것들만 잘 챙겨도 충분하다. 죄책암이나 열등감을 느길 필요는 조금도 없다. 쑥스러워하는 선원에게 창녀가 하는 말처럼, '돈이란 얼마를 가졌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하니까.'
어휘들은 연장통 안에서도 제일 위층에 넣어야 한다. 그러나 어휘력을 키우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할 필요는 없다.
내 말뜻은 굳이 천박하게 말하라는 게 아니라 평이하고 직설적인 표현을 쓰라는 것이다. 낱말을 선택할 때의 기본적인 규칙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제일 먼저 떠오른 낱말이 생생하고 상황에 적합한 것이라면 당연히 그 낱말을 써야 한다.
여기서 한 번 더 기억해두자. '작가에 의해 밧줄이 던져졌다(The rope was thrown by the writer)'가 아니라 '작가가 밧줄을 던졌다(The writer threw the rope)'라고 써야 한다. 제발, 제발 부탁이다.
수동태와 마찬가지로 부사도 소심한 작가들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낸 창조물인 듯하다.
좋은 글을 쓰려면 근심과 허위 의식을 벗어던져야 한다. 허위 의식이란 어떤 글을 '좋다', 어떤 글은 '나쁘다'라고 규정하는 데서 비롯되는데, 이런 태도도 역시 근심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좋은 글을 쓰려면 연장을 잘 선택해야 한다.
[2] 창작론
나는 소설이란 땅 속의 화석처럼 발굴되는 것이라고 믿는다. 소설은 이미 존재하고 있으나 아직 발견되지 않은 어떤 세계의 유물이다. 작가가 해야 할 일은 자기 연장통 속의 연장들을 사용하여 각각의 유물을 최대한 온전하게 발굴하는 것이다.
작가가 되고 싶다면 무엇보다 두 가지 일을 반드시 해야 한다. 많이 읽고 많이 쓰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슬쩍 피해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지름길도 없다.
재능은 연습이라는 말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린다. 자신에게서 어떤 재능을 발견한 사람은 손가락에서 피가 흐르로 눈이 빠질 정도로 몰두하게 마련이다. 들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도 밖에만 나가면 용감하게 공연을 펼친다. 창조의 기쁨이 있기 때문이다. 환희라도 해도 좋다. 그것은 악기를 연주하거나 야구공을 때리거나 400미터 경주를 뛰는 일뿐만 아니라 독서나 글쓰기에서도 마찬가지다. 여러분이 정말 독서와 창작을 좋아하고 또한 적성에도 맞는다면, 내가 권하는 정력적인 독서 및 창작 계획도 별로 부담스럽지 않을 것이다. 아마 여러분 중에는 벌써 실천하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여러분이 누군가에게서 그렇게 마음껏 책을 읽고 글을 써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싶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내 허락을 받았다고 생각하라.
뮤즈를 기다리지 말라. 뮤즈는 워낙 고집센 친구라서 우리가 아무리 안달해도 아랑곳하지 안흔다. 지금 우리가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은 점성술이나 심령 세계 다위가 아니고, 장거리 트럭을 몰거나 배관 공사를 하는 것처럼 하나의 직업일 뿐이다.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날마다 아홉 시부터 정오까지, 또는 일곱 시부터 세 시까지 반드시 작업을 한다는 사실을 뮤즈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그것을 알게 되면 뮤즈는 조만간 우리 앞에 나타나 시가를 질겅질겅 씹으면서 마술을 펼치기 시작할 것이다.
문학적 우수성에 이끌려 소설책을 구입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비행기에 가지고 탈 만한 재미있는 이야기다. 처음부터 마음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아서 끝까지 책장을 넘기게 만드는 그런 소설 말이다.
내가 보기에 소설은 장편이든 단편이든 세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다. A지점에서 B지점을 거쳐 마침내 Z지점가지 이야기를 이어가는 서술(narration), 독자에게 생생한 현실감을 주는 묘사(description), 그리고 등장 인물들의 말을 통하여 그들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대화(dialogue)가 그것이다.
자료 조사에 대해서도 잠시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자료 조사는 전문화된 형태의 배경 스토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제발 부탁인데, 혹시 여러분이 잘 모르는 분야에 대한 소설을 쓰게 되어 자료 조사가 꼭 필요한 경우가 있더라도 부디 '배경'이라는 말을 명심해주기 바란다. 자료 조사는 되도록 멀찌감치 배경에 머물면서 배경 스토리를 마련하는 데 그치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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