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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모음/문화, 영화, 책

[독서] 문재인의 '운명'

by Whatever it is, it matters 2020. 12. 1.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 문재인 대통령님의 저서 운명입니다.

삶의 궤적에서 나오는 깊은 고찰이 돋보이는 저서인데요. 여러가지 마음을 울리는 부분을 발췌해봤습니다.

 

 

 

 

소싯적 이야기

 

우선 10월 유신에 대해서,

10월 유신은, 법대생에게는 더더욱 황당한 일이었다. 유신헌법이 만들어지자 기존의 법전과 교과서들이 무용지물이 돼버렸다.

당시를 회고하면서 그저 황당하게 생각이 되었나 봅니다. 교과서에서 배운 내용과 전혀 다른 세상을 맞이하는 법학도의 정상적인 반응이죠.

 

중국의 문화대혁명에 대한 이야기도 나옵니다.

저도 최근에 알았는데, 문화대혁명은 사실상 중국문화파괴운동이 되어버렸죠.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 고명한 인사였던 리영희 선생이 문화대혁명을 공산주의 관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한 적이 있었는데, 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가 부민협을 할 때, 리영희 선생 초청강연회를 두 세번 한 적이 있다. 뒤풀이 자리에서 내가 리영희 선생에게 질문했다. "중국의 문화대혁명을 높이 평가했던 것이 오류가 아니었는지"라고. 그는 망설임 없이 분명하게 대답했다. "오류였다. 글을 쓸때마다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무척 노력했는데, 그 시절은 역시 자료접근의 어려움 때문에 한계가 있었던 것 같다. 또 그 때는 정신주의에 과도하게 빠져있었던 것 같다." 그 솔직함이 참으로 존경스러웠다.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기" 이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삶을 살아온 모든 사람들이 알수 있을 겁니다. 문대통령은 솔직하게 인정하는 리영희 선생에 감화를 받았고, 이런 태도를 견지하고 누구보다 스스로에게 솔직하고 객관적인 삶을 살고 계십니다. 

 

 

남자라면 군대이야기죠. 문통도 군대 이야기는 참 재밌나 봅니다 ㅎㅎ

입대한 훈련소는 향토사단이라는 창원 39사단이었다. 1975년 8월 초였다.
'문재인, 특전사령부!'라고 발표됐다. 특전사가 공수부대라는 걸 알게 된 것은 용산으로 가는 군용열차가 삼랑진을 지날 무렵이었다. 특전사령부 예하 제1공수 특전여단 제3대대에 배치됐다.
6주간의 특수전 훈련을 마칠 때 정병주 특전사령관으로부터 폭파과정 최우수 표창을 받았다. 정 사령권은 나중에 12·12 신군부 쿠데타때 끝까지 저항하다가 반란군의 총에 맞아 참군인의 표상이 된 인물이다. 전두환 여단장은 그 쿠데타를 이끌고 성공해 대통령까지 됐다. 관등성명을 외웠던 두 직속상관의 운명이 그렇게 극적으로 엇갈렸다.
매년 2주씩 바다에서 수중 침투훈련을 했다. 첫 해에 바로 인명구조원 훈련을 받고 대한적십자사로부터 고급 인명구조원 자격도 취득했다.

 

 

몰랐던 사실 중 하나인데, 유치장 수감 중에 사법시험 합격 소식을 받은.. 어떻게 모든 순간이 이렇게 드라마틱할까요 ㅎㅎ

그리고 당시 경찰의 비도덕적, 탈법적 행태는 정말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게 합니다. 과거의 희생이 오늘을 만든 것이기에 절대 이런 역사를 잊으면 안되죠.

 

여기저기 전전하며 고시공부를 계속했다. 한곳에 오래 있으면 익숙해져서 안일해지고 사람들과 어울리게 된다. 긴장을 유지하려고 일부러 몇 달에 한 번씩 장소를 옮기곤 했다. 늘 저렴한 곳을 찾아다녔다.
농장으로 가는 진입로 입구의 버스정류장에서 우리 일행이 내리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5~6명의 건장한 괴한이 둘러싸며 권총을 들이댔다. 그리고 "꼼짝 마. 손들어. 너 문재인 맞지?"라고 소리쳤다. 나를 체포하기 위해 기다리던 청량리경찰서 정보과 형사들이었다. "영장을 보자"고 했더니 "영장 같은 소리 하고 있네!"하면서 '계엄'이라고 붉은 글씨로 적힌 '계엄증'을 보여줬다. 비상계엄 하에서 영장제도가 정지되니 군소리 말라는 뜻이었다. 처가 식구들이 다 보는 앞에서 수갑이 채워지고 차에 태워져, 그 길로 청량리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됐다.
구속된 지 이십삼, 사일쯤 됐을까, 뜻밖의 낭보를 받았다. 반가운 소식을 가장 먼저 들고 온 사람은 아내였다. 내가 사법시험에 합격했다는 것이다. 그 며칠 후 석방이 됐다. 군사재판에 이미 회부됐다면 석방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합격도 취소되거나 3차 시험 불합격으로 처리되고 말았을 것이다. 다행히 미결상태였기 때문에 석방의 여지가 생겼다. 그 사법시험에서 경희대 합격자는 단 두 명이었다. 그 중 한 명이 합격이 취소될 상황이라 학교 측은 총력을 기울여 구명노력을 했다고 한다.

 

 

 

 

 

 

노무현 대통령, 청와대 생활이야기

문재인 대통령이 어떻게 민정수석비서관을 맡게 되었는지와 청와대 생활의 비화가 나옵니다. 다들 건강이 상하지만 소명의식 하나로 버텨왔었나 봅니다. 지금은 얼마다 더 힘드실까요..

 

이런 문구들을 읽다보면, 문재인 정부 초대 민정수석 '조국' 전 법무부장관을 문재인 대통령이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간접적으로 알게 합니다. 

 

2003년 1월 13일, 이호철과 함께 당선인을 다시 만났다. 그 모임을 어찌 알았는지 어느 지방신문이 보도를 하기도 햇다. 사직동 근처의 어느 한정식 집이었다. 당선인은 무거운 얘기를 꺼냈다. 나에게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을 맡아달라고 했다. 달리 맡길 만한 사람이 없다는 말씀이었다. 이호철에게도 무슨 일이든지 맡아서 도와달라고 했다.
즉답을 할 수 없었다. 며칠 시간을 달라고 부탁드렸다. 이호철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반응이 떨떠름하고 미지근하게 보였던지, 당선인은 "당신들이 나를 정치로 나가게 했고, 대통령을 만들었으니 책임져야 할 것 아니냐"는 말씀까지 했다. 내려와서 1주일정도 고민했다. 나는 인권변호사란 말을 들으면서 권력을 비판하는 역할만 해 왔을 뿐, 국정운영 경험이나 행정경험이 전혀 없었다. 법률가로서 법을 알뿐 국정에 관해서는 백면서생이나 진배없었다. 정치세계도 알지 못했고, 관여해 본 일도 없었다. 부산 선대본부장을 했지만, 민주당에 입당하지 않고 했다.
나는 처음에 청와대 민정수석쯤 되면 청와대 근처에 관사 같은게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경호실 직원들은 직원용 아파트가 있었으나, 비서실 쪽은 비서실장만 공관이 있을 뿐 그 밑에 직급은 관사 같은 게 전혀 없었다. 할 수 없이 세를 얻어야 했다. 마당이 100평 넘는 부산의 집을 팔아도 강남 30평 아파트 전세 값이 안됐다. 평창동의 조그만 연립주택에 세를 얻었다.
나는 그래도 변호사라 저축도 약간 있고 해서 감당할 수 있었다. 지방에서 대학교수 하다가 올라온 허성관 장관이나 권기홍 장관 같은 분들은 서울에 전세 구할 돈이 없어 고생했다.
(생활리듬이 깨졌다) 회의에서도 담당분야를 벗어난 논의를 지켜보노라면 졸음이 밀려오기 일쑤였다. 임기 첫해, 문희상 비서실장과 유인태 정무수석이 회의 때 자주 졸기로 유명했다. 문희상 실장은 당시 알레르기 약을 먹고 있어서 자주 졸았다. 유인태 수석은 옆에서 보기엔 분명히 졸았던 것 같은데, 본인은 눈만 감고 있었을 뿐이라고 늘 우겼다. 그러면서도 회의에서 논의된 내용을 정확하게 꿰고 있는 걸 보면 놀라웠다. 
특히 첫 1년 동안 건강이 많이 상했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안 해본 생활, 안 해본 일에, 잘해보려는 의욕과 긴장 때문에 다들 건강이 많이 상했다. 게다가 대통령이 일중독이라 할 정도여서, 일에서 만큼은 아랫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거의 없었다. 버틸 사람이 없었다. 1년쯤 되자 다들 지쳐서 나가 떨어졌다. 

 

 

 

 

 

 

 

 

검찰개혁에 대하여

검찰개혁이 요즘 화두인데, 이미 20년전에도 똑같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봐요. 노무현 전대통령의 지척에서 수많은 경험과 상념이 검찰에 대한 신념을 만들지 않았나 봅니다.

 

2003년 3월 6일, 정부출범 직후에 법무부가 고검장 인사를 단행했다. 검찰은 조직적으로 반발했다. 언론은 "검란", "집단항명"등으로 표현했다. '대통령과 검사와의 대화'자리가 마련된 출발점이다.
행사가 시작됐는데, 이건 목불인견이었다. 젊은 검사들은 끊임없이 인사문제만 되풀이해 따지고 물었다. 한 사람이 인사 문제에 대해 질문해서 대통령은 충분히 설명했는데, 다음 발언자가 이미 정리하고 넘어간 문제를 똑같이 반복했다. 대통령은 같은 얘기를 계속 반복해야 했다. 인사 불만 외에, 검찰 개혁을 준비해와 말한 검사는 없었다. 오죽했으면 '검사스럽다'는 말까지 나왔을까.
중수부 폐지를 본격 논의하기 전에 대선자금 수사가 있었다. 그 수사를 중수부가 했다. 대통령이나 청와대는 검찰이 정권 눈치 보지 않고 소신껏 수사할 수 있게 보장해 줬다. 이 수사로 검찰이 국민들로부터 대단히 높은 신뢰를 받게 됐다. 그 바람에 중수부 폐지론이 희석됐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중수부 폐지를 추진하게 되면 마치 대선자금 수사에 대한 보복 같은 인상을 줄 소지가 컸다. 그 시기를 놓치니 다음 계기를 잡지 못했다. 아쉬운 대목이다. 그렇게 하면서까지 지켜준 검찰의 정치적 중립이며 독립이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 들어서자 마자 그들은 순식간에 과거로 되돌아가 버렸다.
검찰총장 입장에선 누가 물밑에서 압력을 가해, 자신이 받아들이기 힘든 일을 강요했다면 과감하게 내용을 공개하고 옷을 벗을 수도 있다. 그게 검찰의 정치적 중립을 위해 필요하다. 하지만 천 장관은 공개적으로 그리고 공식적으로 절차를 밟았다. 검찰총장은 자기 소신과 달라도 법무부 장관 지시에 의해 처리하는 게 절차다.
개혁입법이 중요한 시기에 법사위원장을 야당에게 넘겨준 국회원 구성 협상의 잘못이 있었다. 직권상정을 하지 않는 우리 쪽의 '양심'도 개혁입법을 밀어붙이지는 못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런 사정으로 폐지가 어렵다면, 우선 남용되는 조항이라도 개정하는 방안을 강구해 봤어야 했다. 그런데도 우리 진영의 근본주의가 그런 타협을 용납하지 않았다.

 

국정원/감사원에 대한 생각도 읽을 수 있습니다.

나는 주례 대면보고와 독대보고를 없앤 대통령의 조치를 지지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조치가 국정원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국정원장의 조직 장악력을 떨어뜨리지 않을까 염려됐다. 국정원 내부에서 대통령이 관심을 가지지 않는 정보보고를 계속 해야 하느냐는 동요의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국정원장의 직접 보고를 받지 않는다는 것은 정보기관의 존립의미를 상실한 것처럼 여기는 인식이 국정원 내부에 있었다.
대통령도 주례보고와 독대보고를 받지 않겠다는 것일 뿐, 보고 할 일이 있을 경우 언제든지 관련 수석등의 배석하에 보고를 받겠다고 했다.
감사원 지휘기능을 아예 국회로 넘기는 방안도 검토했다. 역시 대통령 생각이었다. 미국의 경우 의회 산하에 감시기구를 두고 있다.

 

 

 

 

 

 

 

광해가 생각나는 미국의 파병요청 대응

 

 

진보, 보수세력 전부에게 엄청난 비난을 받았던 자이툰부대 파견... 

영화 광해를 보면 나오죠. 적당히 하시오, 적당히들... 양극단의 세력들은 정말 적당히를 모릅니다 ㅎㅎ

어렵고 고통스러운 결정이 우리나라를 살렸다고 봅니다.

미국은 파병요청을 하면서, 공식적으로는 규모를 이야기 하지 않았다. 물밑으로 말하는 규모는 5천~7천 명 선의 전투보병이었다. 외교·국방·안보라인은 한술 더 떠서 '1만 명 이상의 전투병을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적어도 사단급 규모가 돼야 독립된 구역을 맡아 독립된 작전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안 그러면 미군 밑에 예속돼 미군의 지휘를 받게 된다고 했다. 반면 청와대 내의 정무분야 참모들은 파별을 반대했다. 나도 반대였다. 정의로운 전쟁이라고 보기도 어렵고, 파병했다가 희생 장병이 생기게 되면 비난여론을 감당하기 어렵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통령 생각도 다르지 않았다. 개인적으로는 파병을 마땅치 않아 하는 입장이었다. 파병을 반대하는 우릳르 주장을 백 번 수긍하고 공감했다. 그러나 그때 한국은 북핵 위기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미국의 협조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상황이었다.
대통령의 고민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NSC사무처 이종석 차장이 묘안을 내놨다. '미국의 파병요구를 받아들이되, 파병규모는 최소한으로 한다. 파병은 비전투병 3천 명으로 한다. 파병성격도 전투작전 수행이 아니라 전후재건사업 지원이다.' 이런 방안이었다.
어렵고 고통스런 결정이었지만, 파병을 계기로 북핵문제는 대통령이 바라는 대로 갔다. 미국의 협조를 얻어 6자회담이라는 다자 외교 틀을 만들어냈다. 6자 회담을 통해 북핵문제를 대화를 통한 외교적 방법으로 풀어갈 수 있었다. 한때 북폭까지 주장했던 네오콘의 강경론을 누그러뜨리면서 위기관리를 해 나갈 수도 있었다.

 

 

 

 

 

 

 

 

탄핵이야기

 

 

얼마다 담배가 땡겼을까요. 이해합니다. 외로운 청와대 생활.

대통령이 담배를 권하기도 하고, '문 수석, 담배 한 개비 주지'하며 내 담배를 가져가시기도 하니, 함께 피우지 않을 수 없어다. 대통령도 늘 여사님으로부터 잔소리를 듣는 처지였다.

탄핵시기의 에피소드도 흥미롭습니다.

개업신고를 하고 야인 생활을 하다,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했다. 나부터 개업신고를 냈다. 청와대 들어가면서 변호사를 휴업한 상태라, 부랴부랴 다시 변호사 재개업 신고를 했다. 나로선 노무현 변호사의 대우조선사건구속 이후, 의뢰인과 변호인의 인연으로 이어진 게 두 번째였다. 내가 서울 변호사가 아니라 사무실도 없었다. 서초동에 임시 사무실을 구했다.

네팔로 휴가를 갔다가, "President Roh, Impeachment" 기사를 읽고 한달음에 귀국한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역할 분담을 했다. 유현석 변호사께서 좌장역할을 맡았다. 한승헌 변호사가 총괄을 자임했다. 나머지 분들은 논점별로 분야를 나눠맡았다. 어떤 분야는 이용훈 변호사, 또 어떤 분야는 박시환 변호사 식으로 역할을 나눴다. 나눠 맡은 논점별로 연구도 발제도 서면도 직접 작성했다. 법정변론도 분담했다. 재판 때마다 발언할 대리인의 수와 순서,  발언할 내용, 돌발적인 상황에 대한 대응 등 세부적 부분까지 모두 의논해 재판에 임했다.

그리고 촛불시위에 대한 감동. 장엄했다.

연일 시청 앞 도로를 가득 메운 촛불 인파는 장엄했다.

탄핵당시 대통령의 이야기

대통령은 오랜 유폐생활로 지치고 마음이 불편했을 텐데도 유머를 잃지 않았다. 환담 끝날 무렵에 내가 대통령께 "마지막으로 대리인단에게 당부하실 말씀이 있으면 하시라"고 했다. 대통령이 벌떡 일어나 "저 대통령 다시 하게 좀 해 주십시오"라며 인사를 했다. 무거운 자리일 수도 있었는데, 일행 모두가 웃으며 헤어질 수 있었다.
탄핵재판 도중인 4월 15일, 제17대 국회의원 총선이 있었다. 나는 선거 막바지에 부산지역의 몇몇 선거구에서 유세를 지원했다. 선거결과 열린우리당이 전체 299석 중 152석을 석권해 단독으로 원내 과반수 정당이 됐다.
탄핵에 대한 무서운 민의의 심판이었다. 나는 이 총선 결과야말로 헌재의 탄핵재판 결정에 쐐기를 박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5월 14일, 드디어 헌재결정이 내려졌다. 기각이었다. 슬픈 일도 있었다. 대리인단의 좌장 역할을 하셨던 유현석 변호사가 최종변론 후 쓰러져서,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5월 25일 타계하셨다. 평생을 인권변호사로 살다 탄핵재판에 마지막 불꽃을 사르셨다.

 

 

마지막 비서실장
대통령 임기 마지막 해인 2007년 3월, 다시 대통령이 불렀다. 참여정부 청와대 마지막 비서실장을 맡게 됐다. 청와대에 세 번째로 들어가게 됐다. 진심으로 맡고 싶지 않았다. 마지막 비서실장은 퇴임 후까지도 생각해야 하는 자리임을 잘 알고 있었다. 솔직히 이제는 자유롭고 싶고, 내 자리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대통령의 정치적 상황이 워낙 어려웠다. 이미 정권교체가 뻔히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그럴수록 마무리가 중요했다. 말년에는 인사 자체가 힘든 법이다. 대통령이 다른 선택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 우짜겠노. 대통령과 마지막을 함께 하자'고 생각했다. 
비서실장을 하는 동안 가장 큰 일은 2007년 10월의 남북정상회담이었다. 참여정부의 남북정상회담 기본 원칙은 국정원, 통일부 등 대북관련 공식기구를 통해서 공식적으로 추진한다는 것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원칙
대통령은 열린우리당이 깨지는 것을 아주 가슴 아파했다. 당신의 정치인생의 실패로까지 생각했다. 대통령이 가장 아프게 생각한 것은 대선 패배가 아니었다. "힘이 모자라거나 시운이 안되면 패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패배하더라도 우리의 가치를 부둥켜안고 있어야 다음의 희망이 있는 법이다. 당장 불리해 보인다고 우리의 가치까지 내버린다면 패배는 말할 것도 없고, 희망까지 잃게 된다"는 것이 대통령의 생각이었다. 당시 우리 진영이 열린우리당을 깨고 나간 일을 대통령은 그렇게 봤다. 대통령은 "계산하지 않는 우직한 정치가, 길게 보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도 가장 좋은 길"이라고 늘 강조했다.
그 말이 옳음을 스스로 증명하기도 했다. 길게만 보면, 국민들 눈에는 뻔히 보이는 이치인데 정치하는 사람들이 왜 그걸 보지 못하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대통령은 또 이런 강조를 늘 했다. "대선에서 질 수도 있다. 이기면 좋지만 늘 이길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러나 패배하면 패패하는 대로 다음에 대한 희망을 남기는 패배를 해야 한다. 그러려면 대의나 원칙을 지키면서 대선에 임해야 한다. 특히 명분을 버리면 안 된다. 대의도 원칙도 명분도 다 버리고 선거에 임하면 이기기도 어렵고, 패배 후의 희망까지 잃게 된다."

 

 

 

 

청와대 그 이후

저도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 당시가 제일 행복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님이 마음의 짐을 던져 놓을 수 있었던 그 시점...

많은 사람들 덕분에 대통령도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았다. 환영행사에서 대통령은 인사 말 끝에 크게 외쳤다. "야~~ 기분 좋다!" 나도 속으로 소리를 질렀다. '야, 나도 해방이다!'
봉하에 자리를 잡은 대통령도 농군으로 잘 지내고 계셨다. 양산에 있으면서 가끔 들렀다. 대통령이 누군가 예방을 받을 때 격식을 갖출 필요가 있으면 가서 배석을 하고, 무슨 공식행사에 갈 때는 수행도 했다. 그럴 때는 배석하는 사람도 있어야 대통령도 체면이 설 것 같아 봉하에서 요청하면 언제든지 갔다.
갈 때마다 좋았다. 마을을 찾는 방문객들이 날이 갈수록 늘고 있었다. 그들은 소리를 질러가며 대통령을 집밖으로 불러내 환호하고 사진을 찍으며 좋아했다. 대통령은 하루에도 몇 번씩 집밖으로 불려 나갔다. 방문객들에게 인사하는 일을 고달파했지만 그러면서도 좋아했다.

 

 

그리고..

그냥... 마음이 아파 이후는 읽는 것도 힘들 내용들이죠.

나와 아내도 박석 하나를 신청했다. "편히 쉬십시오" 단 한 줄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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